"화폐가 종잇조각으로"…영란은행, 화폐 발행을 독점하다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입력 2022-08-02 06:30
수정 2022-08-31 00:01
1694년 사업가들로부터 120만파운드의 기금을 조성해 만들어진 영란은행은 현재의 중앙은행과 형태, 업무 면에서 차이가 있는 은행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기점으로 발권력을 가지게 됐지만, 영란은행의 화폐는 법화가 아닌 은행권 형태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은행권 소지자가 발행 은행에 요구하면 언제든지 법정화폐로 바꾸어주겠다는 약속이 내재된 화폐를 뜻합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가 유지되는 한 법정화폐와 유사하게 취급되지만, 경제위기가 닥치거나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면 화폐의 가치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법화는 소브린(sovereign)이라고 불리는 금화였습니다. 각종 은행권은 금화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시중은행 신용에 문제가 생기면 관련 은행권의 가치는 종잇조각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1833년 영국 정부의 국채를 관리하던 영란은행이 법화의 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1844년에는 영란은행만이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고 규정한 필조례(Peel's Bank Act)가 제정됩니다.

필조례는 크게 두 영역으로 구성됐습니다. 하나는 각 은행의 은행권 발행 최고 한도를 1400만 파운드로 정하고 은행들의 발행권이 상실될 경우 그 발행권을 영란은행이 계승하게 해 궁극적으로 영란은행이 영국 내 은행권 발행을 독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 은행에서 이뤄져 온 은행 업무와 발행 업무를 구분해 발행업을 은행업으로부터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현재와 같이 한국은행과 조폐공사가 나뉘어 업무를 수행하는 형태가 필요하다고 본 겁니다.

필조례가 제정된 이면에는 시중은행들의 은행권 발행에 대한 재량권을 박탈해 은행권의 유통량을 금속 통화의 유통량과 비슷 또는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은행권을 과다하게 발행하면 경제공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은행권의 발행을 금의 유출입양에 비례하게 조절해야 한다는 통화주의적 시각이 반영된 것입니다.

필조례의 목적은 금본위제와 같은 맥락으로 통화 유통량을 제한해 화폐 과다 발행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위기를 예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필조례는 공황을 예방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유동성 공급을 제한해 공황을 심화시키는 역기능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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