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서울에서 전기차를 가장 먼저 구매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1호의 숙명일까요. 지방을 마음 편히 오가기에는 배터리 성능도 부족하고, 제대로된 인프라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온갖 열악함과 불편함을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는 "차라리 내가 해결하겠다"며 달려들었습니다. 지금은 국내 전기차 충전 분야 선두업체 '차지인(車之人)'의 최영석 대표 얘기입니다.
전 세계에는 약 660만 대의 전기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전기차 확산 속도가 한층 가팔라질 전망입니다. 전기차 보편화를 위해서는 '충전 인프라'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기업들이 잇따라 전기차 충전 시장에 뛰어드는 이유입니다.
뜨거운 전장(戰場)이 되고 있는 전기차 충전사업 분야의 선두 업체 차지인의 최 대표를 한경 긱스(Geeks)가 만났습니다.
서울시 1호 전기차 오너"제가 원래 남들이 안 하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잘해요. 전기차 구입도, 충전 사업도 마찬가지였죠. "
지난달 경기 분당의 사무실에서 만난 최영석 대표는 10여넌전까지 데이터 분석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가 맡은 분야는 차량 사고·데이터 분석 업무였다. 전기차와 인연이 시작된 건 2014년, 자동차 전문가로서 제주도의 전기차 민간 보급 정책과 관련해 자문을 맡게 되면서였다.
제주도는 2013년 6월 '카본 프리 아일랜드'를 선포하며 전기차 160대 민간 보급을 실시한 바 있다. 국내 전기차 보급 사업은 제주도를 시작으로 2014년부터 전국으로 확대됐다.
그때의 전기차는 한번 충전하면 100~120km 남짓밖에 가지 못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4번 이상 충전해야 하는 안타까운 성능으로 대부분의 사람 전기차를 사지 않았고, 테슬라는 투자자들과 증권업계에서 비웃음을 샀다.
그야말로 '전기차 공룡시대'였던 2014년 말, 최 대표는 서울시 1호 전기차 오너가 됐다. 그가 구입한 차량은 BMW I3 모델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기차를 샀던 1000명의 얼리어답터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그는 "친환경 차인 데다 유지비가 크게 줄어 경제적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I3를 타고 다니며 자동차 잡지에 시승기를 썼고 주변에서는 전기차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테슬라 타보고 사업 결심"사용해보니 전기차의 맹점은 명확했다. 열악한 '충전 인프라'가 대표적이었다. 전기차 운전자는 동네에 몇 없는 충전소를 찾아 돌아다녀야 했고 막상 충전소에 가면 충전기가 고장 난 경우가 많았다.
그는 나름대로 방법을 고안해 개인용 충전기를 주차장에 설치하려고 했지만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입주자 대표 회의를 열어야 했고(최 대표는 공동주택에 살았다), 입주민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전기안전 공사에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문의했을 땐 "그게 뭐냐, 처음 들어본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이러한 불편함을 체감한 그는 2016년 미국 출장을 계기로 충전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미 전기차에 대한 시장의 큰 움직임이 일고 있었고, 친환경 자동차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차 시장은 커질 텐데 충전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자동차 사고분석 세미나 때문에 가게 된 미국 출장에서 테슬라를 타보고 전기차 사업자들을 많이 만났어요. 다양한 독일 전기차 충전 스타트업들도 만났고요. 그때 충전 회사를 따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녀와서 바로 사업자등록을 했어요."
2016년 말 최 대표는 전기차 완속 충전 서비스 회사인 '차지인'을 설립했다. 차지인은 포스코ICT의 전기차 충전 사업부에서 필요로 하는 충전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개발했다. 충전기 자체뿐 아니라 돈을 내고 사용할 수 있도록 백엔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사업에 나섰다. 고속충전, 빼박이...휴대폰 충전과는 달랐다충전 서비스를 하던 차지인은 내친 김에 '콘센트형 충전기' 개발에도 나섰다. 충전사업을 해보니 고속 충전은 전력량이 막대하다. 거기에 '빼박이'도 필요했다. 한 차량이 충전을 완료하면 빠지고 바로 다음 차가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다. 충전기 또한 부피가 커서 공간을 많이 필요로 했다.
"고속 충전보다 저속이라도 집에서 밤에 충전하는 게 제일 편하다고 생각했어요. 아파트 주차장에는 막대한 전력이 들어가기 어렵기도 하고요. 콘센트를 가지고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죠"
최 대표는 창업 직후부터 1년 만에 돈 받고 쓰는 충전기를 개발했다. 그가 만든 전기차 과금형 콘센트는 220볼트 콘센트만 있는 곳이면 건물 어디에나 충전기를 설치할 수 있었다. 건물주들이 설치하면 전기차 이용자들로부터 충전 요금을 받을 수 있어 충전기 보급을 확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문제는 '규제'였다. 전기차 충전 콘센트는 현행 전기사업법상 ‘전력 재판매’에 해당해 사업 허가가 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한국전력만 전기를 판매할 수 있어 민간 사업자가 이를 재판매 할 경우 불법이었다. 또, 콘센트는 전기차 충전기가 아니라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발목을 잡았다.
전기사업법에 맞지 않아 1년 반 넘도록 상용화를 이루지 못하던 과금형 콘센트다. 사업이 좌초에 될 위기에 처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차지인 팀은 과금형 콘센트 사업이 2018년 산업통상자원부의 ‘규제샌드박스 임시 허가 1호’로 선정되면서 난관에서 벗어났다.
"규제개혁심의위원회에 들어가고 수백장의 서류를 작성하고…1년 반 동안 공무원들을 쫓아다녔어요. 사업이 허가가 안 되는 이유와 관련해서 서류를 다 받아놨어요. 규제샌드박스에 최초로 선정된 건 아마도 이런 자료들이 많아서였던 것 같기도 해요. 너무 안 되는 걸 가지고 사업한다고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저희가 되어 버린 거에요! 그때는 '저런 것도 되나 보다' 했겠죠. "
차지인의 전기차 충전용 과금형 콘센트는 건물 지하 주차장에 있는 220V 콘센트에 두 뼘 크기의 이 기기만 설치하면 간단히 전기충전소가 된다. 과금형 콘센트는 입법화돼 이제는 누구나 콘센트 가지고 사업할 수 있게 됐다. 1호의 숙명...규제부터 뚫어야 했다최 대표는 전기차 충전사업을 '부동산설비업'으로 비유했다. 그는 "주차할 자리 있어야 하고 전기가 있어야 하는데 부동산 주인이 이거 둘 다 가지고 있다"며 "건물주가 아닌 이상 그들을 대신하거나 대행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충전기는 '에어비앤비'(Airbnb) 사업 모델처럼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전기차 충전 에어비앤비’ 사업을 모색했다. 전기자동차충전사업자로 등록된 공유플랫폼사업자가 전기안전관리자를 고용해 개인용 전기차 충전기를 위탁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현행법상 허가되지 않았다. 충전 '사업자'만이 돈을 받고 충전기를 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지인은 여러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중소기업벤처부가 주관하는 '규제자유특구' 사업에 지원하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정부는 2019년 11월 제주를 ‘전기차 충전 서비스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해 전기차 충전기를 소유한 개인이 충전사업자로 등록하지 않고서도 충전기의 운영과 관리를 충전사업자에게 위탁할 경우, 수익 창출이 가능하도록 실증 특례를 부여했다. 실증 특례를 마치고 규제샌드박스에서 임시허가로 전환했다. "규제의 다른 말은 진입장벽" 최 대표가 규제의 장벽을 무사히 넘어설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역할을 맡아본 경험이 컸다. 그는 자동차 데이터 분석가로 활동하며 현대차그룹 서비스 개발 운영과 쏘카 차량 단말기 플랫폼을 만든 이력이 있다.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 사건과 관련해서는 기술 분석을 맡기도 했었다.
한라대 미래모빌리티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기도 하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기관이나 정부의 입장과 업계의 분위기를 모두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규제로 몇 년간 고통받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공장도 만들고, 제조업 면허 등 기술 축적을 많이 해놔서 해외 사업에 도움이 됩니다. 규제는 다른 말로 하면 타 회사에 대한 '진입장벽'이기도 하죠. 먼저 규제를 넘어서면 후발 주자보다 앞서가는 상황이 만들어지니까요. 그런 부분에서 규제의 덕을 조금은 봤다고 해야 할까요. " (웃음)
이젠 본격적인 사업의 궤도에 오른 차지인은 최근 충전기 로밍 사업을 시작했다. 충전 업체 중 하나 에 가입하면 중간에서 다른 업체로 로밍해주는 서비스다. 그는 "현재 정부 보조금을 받는 국내 전기차 충전사업자만 25개인데 업체 간 로밍이 되면 하나만 가입해서 나머지 다 쓰면 된다"고 덧붙였다. "가장 뜨거운 시장 될 것"
전기차 시장이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전치가 충전 인프라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면서 국내 주요 기업들은 잇따라 충전 사업에 나서고 있다.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시장 확대와 관련 기술 개발 등 충전기 시장이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오를 것이란 관측이다.
지난달 LG전자는 GS에너지와 손잡고 국내 전기차 충전기 전문업체 애플망고를 인수하며 전기차 충전 솔루션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태양광 사업 전문 한화솔루션 큐셀부문(한화큐셀)도 지난 5월 '한화모티브'라는 새 브랜드를 앞세워 전기차 충전사업에 나섰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4월에는 롯데그룹·KB자산운용과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고 2025년까지 국내에 초고속 충전기 5000 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롯데는 롯데정보통신을 통해 올 초 충전기 업체 '중앙제어'를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도 전기차 충전시장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전기차 관련 사업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기업들이 전력 질주를 하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미국은 바이든 정부가 충전사업자에게 보조금을 준다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전력 기반 사업자들이 거의 전쟁을 벌이고 있어요. 조만간 미국으로도 진출하기 위해 기회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정부 정책에 따라 산업이 많이 움직일 것 같아요. 워낙 역동적인 시장이라 기대가 됩니다. "
성남=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