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아쉬워하는 딜(deal)이 있다고 합니다. AMD 인수합병(M&A)입니다. AMD는 인텔의 강력한 경쟁자로 꼽히는 미국의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입니다. 노트북에 인텔 대신 붙어 있는 'AMD RYZEN'으로 친숙한 기업입니다. 주력 제품은 라이젠(RYZEN) 브랜드의 CPU와 라데온(RADEON) GPU입니다. 최근 미국 반도체 기업 '자일링스' 인수를 계기로 인공지능(AI) 반도체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 퀄컴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팹리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AMD 죽 쑬 때 인수 검토...SK텔레콤이 AMD 인수를 추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비밀리에 추진됐기 때문이죠. M&A 얘기가 오고 간 시점은 하이닉스반도체(지금의 SK하이닉스) 인수로 재미를 본 이후로 전해집니다. AMD가 인텔과의 경쟁에 밀려 죽을 쑤고 있던 시점이었죠. SK는 고민 끝에 인수를 포기했습니다. 인텔이란 거인을 상대로 싸워야하는 AMD에 대해 '승산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SK하이닉스 인수 이후 그룹에 현금이 부족한 측면도 있었겠죠.
AMD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 기적처럼 살아납니다. 2014년 10월 대만계 미국인 리사 수가 AMD의 CEO를 맡은 이후부터입니다. 콘솔게임용 반도체로 입지를 다지고 PC 시장에서 인텔과의 경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저가형'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가성비가 좋다'는 평판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2021년 4분기엔 드디어 PC CPU 시장 점유율 25%를 돌파합니다. 2006년 이후 15년 만입니다. AMD 시총, SK텔레콤+SK하이닉스의 2배 넘어 주가도 수직상승했습니다. 2018년 상반기까지는 10달러대를 왔다갔다했습니다. AI 시대가 성큼 다가오며 반도체 업체들이 수혜주로 꼽혔습니다. AMD도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AI 반도체 시대에 대비했습니다. 지난해 주가는 장 중 164.46달러까지 올랐습니다.
올 들어 반도체주가 힘을 못 쓰며 주가도 88.10달러까지 곤두박질쳤지만 시가총액은 1427억달러(약 187조원)에 달합니다. SK텔레콤(약 11조4000억원)은 물론 SK하이닉스(72조8000억원) 시총을 합쳐도 AMD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역사에 '만약'은 의미가 없지만, SK텔레콤이 AMD를 인수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최고 10배 이상의 수익은 냈을 겁니다. 수익률을 떠나 SK하이닉스와 AMD를 동시에 보유한 SK가 세계 최고의 반도체그룹으로 통했겠죠. SK의 한 고위 관계자는 AMD 인수 건에 대해 "놓친 (좋은) 딜은 지나고 나면 속이 쓰리다. 그런데 이야기해서 뭐하겠냐"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SK텔레콤, '사피온' 출범시켜 AI반도체 도전장AMD를 놓친 아쉬움 때문일까요. SK텔레콤은 팹리스 사업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SK가 SK하이닉스를 통해 반도체사업을 하는 건 다 알고 계실텐데요. '사피온'이란 업체를 통해 AI 반도체 개발 및 판매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원래 SK텔레콤 자회사였는데 작년말 분사했습니다.
미국 팹리스의 본고장 실리콘밸리에 본사가 있습니다. 삼성전자 출신 반도체 전문가 류수정 대표가 회사를 이끌고 있습니다.
AI 반도체는 데이터 학습·추론에 필수적인 대규모 연산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칩입니다. 구글 검색, 유튜브의 동영상 추천 등에 AI 반도체가 쓰이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GPU가 데이터 학습·추론용 반도체로 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시장점유율은 90% 안팎으로 추정됩니다. 앞으론 AI 반도체가 역할을 대신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사피온은 ‘추론’에 특화된 반도체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AI의 추론은 학습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고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통신 의존도 낮추고 신사업 확장에 주력사피온은 제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2020년 SK텔레콤이 내놓은 AI 반도체 'X220'이 사실상 사피온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내년 상반기엔 X330이란 새로운 AI 반도체를 출시한다고 합니다.
원래 반도체 기업도 아닌, '통신사'에서 출발한 작은 조직이 세계적인 팹리스 강자이자 AI 반도체 시장을 90% 이상 갖고 있는 엔비디아에 도전장을 낸 것입니다.
SK그룹도 반도체 사업에 '진심'인 것 같습니다. 최근 만난 고위 관계자에게 "사피온이 엔비디아를 이길 가능성이 있겠냐. 진짜로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것이냐, 흉내만 내는 것이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팹리스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겠냐. 현재 AI 반도체는 뚜렷한 승자가 없는 상황이다. SK하이닉스를 갖고 있는 SK그룹이 실력 있는 팹리스까지 갖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하더군요.
업계에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물론 쉽지 않은 경쟁이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하지만 저는 한정된 국내 통신시장에 의존하는 '천수답'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SK텔레콤의 사업 확장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가능성을 보고 일단 도전해보는 게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 아닐까요. <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안녕하세요. 황정수 기자입니다. 실리콘밸리 특파원을 거쳐 이달 초부터 통신, 포털, 게임, 외국계 IT 기업을 담당하는 산업부 테크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주부터 테크톡(tech talk)을 시작했습니다. 업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소식을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분석을 더 해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