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21일 열린 통화정책회의에서 ‘빅스텝(한 번에 0.5%포인트 금리 인상)’을 단행해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초 ECB는 “7월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고, 9월에도 연달아 올리겠다”고 예고했었다. 금리 인상폭을 확대한 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6%나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물가가 8개월 연속 상승하며 또다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자 ‘빅스텝’으로 급선회했다.
◆고물가에…마이너스 금리 실험 끝내ECB는 이날 “기준금리와 수신금리, 한계대출금리 등 3개 정책금리를 각각 0.5%포인트 올린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기준금리는 연 0.5%, 수신금리와 한계대출금리는 각각 0%와 연 0.75%로 올랐다. ECB는 성명에서 “물가 상승률을 중기 목표치(연 2%) 수준으로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라며 “향후 통화정책회의에서도 추가적인 금리 인상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ECB는 유럽 재정위기가 본격화한 2011년부터 금리를 점진적으로 낮춰왔다. 시중 유동성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다. 2014년 6월엔 처음으로 수신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췄다. 시중은행들이 ECB에 돈을 예치하려면 이자를 받는 대신 비용을 내게 했다는 의미다. 2016년 3월부터는 기준금리를 ‘제로(0)’로 내려 6년 넘게 유지해왔다. 이날 11년 만의 금리 인상을 통해 주요국 중앙은행으로선 이례적으로 도입한 ‘마이너스 금리 실험’을 8년 만에 끝냈다.
이날 정책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나 올린 배경에는 가파른 물가 상승세와 강(强)달러로 인한 유로화 약세가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 은행 ING의 한 거시경제 전문가는 “지난달 유로존 19개국 중 9개국이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며 “ECB 대응이 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의 금리 차를 축소하기 위해서라도 ECB는 금리 인상폭을 확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지난 3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5%포인트 올렸다. 오는 27일에도 0.75%포인트 인상이 유력하다. ◆경기침체, 남유럽 부채 위기 어쩌나ECB는 다른 중앙은행들에 비해 더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유럽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있어 에너지 위기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대응을 놓고 저울질해야 하는 ECB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유럽 싱크탱크 브뤼겔의 마리아 데메르치스 부소장은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으면 ECB는 금리를 계속 올려야 한다”면서도 “에너지 위기 때문에 경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다른 나라보다 더 높은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ECB 통화정책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인 올리 렌 핀란드 중앙은행 총재는 최근 한 연설에서 “9월 이후 금리 인상폭은 유럽 경제 상황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유로존 회원국 국채 간 금리 격차(스프레드)를 줄여야 하는 숙제도 있다. 이날 독일과 이탈리아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 격차는 2.3%포인트를 기록했다. 격차가 확대될수록 이탈리아 정부의 이자 등 상환 부담은 커진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 금리가 연일 급등(국채 가격 하락)하고 있어 유로존 부채 위기가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분석했다.
ECB는 2011년 7월 마지막으로 금리를 인상했지만 유럽 내 부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4개월 만에 다시 금리를 내린 바 있다. ECB는 이날 남유럽 국가들의 채권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새로운 채권 매입 프로그램(TPI)도 공개했다. 채무 위험이 높은 국가의 국채를 더 많이 매입해 금리 인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