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여러 개 보고 고를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제품을 사지 않으면 구매하기 어렵습니다.”
백화점 두 곳에서 우수고객(VIP)인 강모 씨(40)는 최근 강남의 한 샤넬 매장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습니다. 오랜 시간 대기한 뒤 들어간 매장에 마침 강 씨 마음에 드는 가방이 있었습니다. 총 세 점 있는 제품 상태를 서로 비교한 뒤 구매하려 했지만 매장 직원이 이처럼 제지한 것입니다.
매장 측에선 재고 여러 개를 함께 놓고 비교하며 고르는 건 허용하지 않으며, 한 번 본 물건을 다시 확인하는 것 또한 금지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방을 본 직후 바로 구매 결정을 하지 않으면 그 물건은 살 수 없도록 했습니다. 상품을 놓고 고민하거나 다른 재고와 비교해 더 나은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겁니다.
강 씨는 “재래시장이나 동네 구멍가게에서 1000~2000원짜리 물건 살 때도 이것저것 보고 적당한 걸 고르게 해준다”며 “1000만원 넘는 가방을 사면서 어떤 제품이 양품인지 서로 비교하고 확인해보지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샤넬 매장에선 소비자 권리가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 구매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글로벌 명품 시장에서 한국의 비중이 빠르게 커지고 있지만 도리어 한국 소비자를 대하는 명품 브랜드의 태도는 갈수록 나빠진다는 평입니다. 가격은 1년에 4~5차례씩 올리면서 고객을 배려하지 않는 서비스로 실망감을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보상소비 심리를 등에 업고 덩치를 키운 명품 브랜드들이 국내 소비자 대상으로 ‘배짱 영업’과 ‘갑질’을 일삼고 있다는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수백만~수천만원짜리 물건을 고르지도 못하게 해요.”
“품명을 제대로 모른다고 무안을 주더군요.”
“물건 몇 개 보겠다고 하니 대꾸도 안하고 제품만 쾅쾅 내려놔서 민망해 혼났어요.”
한 포털 사이트 명품 구매대행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입니다. 이처럼 명품 매장에 들어갔다가 제대로 된 응대를 받지 못해 기분이 나쁘다는 게시글이 수시로 올라옵니다. 각각 수천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많은 누리꾼들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매장 직원들의 불친절한 응대에 대한 경험은 양상이 다양합니다. 매장에 들어선 손님을 적게는 10분에서 길게는 30분까지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는 ‘방치형’부터 손님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무안을 주는 ‘무안형’ 등까지 있습니다. 한 소비자는 “가방처럼 쓸 수 있는 지갑 제품을 달라고 했더니 한 직원이 품명도 모르고 왔냐고 핀잔을 주더라”며 “제품명이 WOC라던데 일반 고객이 모델 이름까지 미리 공부해 가야 하는 거냐”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명품 업체들은 이 같은 서비스 악화를 직원 개인 책임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불친절한 매장 리스트가 공유될 정도로 공감대를 얻고 있습니다. 심지어 명품 매장의 고압적인 태도에 주눅 든 일부 소비자들은 구매 전에 친절한 매장과 불친절한 매장을 확인한 후 방문할 정도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일반 소비자들은 명품 매장 입장조차 편히 하지 못합니다. 샤넬은 '판매 유보고객' 리스트를 관리합니다. 고객을 가려받는 겁니다. 이 리스트에 오른 고객들은 샤넬 제품을 구매할 수 없으며 샤넬 매장 직원의 서비스도 받을 수 없습니다. 샤넬 제품을 사기 위한 대기열 등록도 할 수 없어 사실상 매장 방문이 금지돼 있습니다.
샤넬 측은 판매 유보 고객의 기준을 정확하게 제시하진 않지만 환불 횟수가 일정 이상이거나 반복 구매 횟수가 과도한 경우 등이 해당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직장인 박 모씨(30)는 지난달 7시간 이상 대기해 입장한 샤넬 매장에서 가방을 사려다 퇴짜를 맞았습니다.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 씨는 현금으로 물건을 구매하겠다고 했지만 이 경우에도 신분 확인이 안돼 판매 불가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같이 방문한 지인이 대신 결제해주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거부당했습니다.
본인 명의 카드 결제 뿐만 아니라 신분증 지참을 '강제'하고 있어서 입니다. 매장 입장을 위해 대기 명단에 본인 명의로 등록하고, 입장 시 신분증 확인까지 받아야 합니다. 소비자들이 신분 확인 후 구매를 허락받는 형태입니다. 수백만~수천만원의 큰 돈을 내고 물건을 구입하는 고객들이지만 명품 매장에선 ‘을’이 되는 셈입니다.
명품 브랜드들이 이처럼 영업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장사가 잘되기 때문입니다. 잦은 가격 인상과 고객을 배려하지 않는 서비스에도 국내에선 매년 최고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명품시장 규모는 약 17조원으로 독일을 제치고 7위로 올라섰습니다. 한국보다 규모가 큰 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뿐입니다.
이쯤되면 소비자들이 명품의 ‘갑질’에 지나치게 관대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백 하나 가격이 웬만한 경차 가격 버금가는데도 업체들의 형편없는 서비스에 놀라고, 그런데도 수많은 소비자들이 매장에 들어가지 못해 난리라는 소식에 또 한 번 놀란다”며 “다른 나라에선 이렇게 영업 못한다. 유독 한국에서만 보이는 이해 못할 문화"라고 놀라워했습니다. 이어 "소비자들이 ‘호갱’을 자처하는 데 명품업체들이 잘못된 관행을 고쳐야겠다는 인식을 하겠느냐”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