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의 원활한 주식 매매를 돕기 위해 도입된 시장조성자제도 파행이 장기화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9월 시장조성자 역할을 하는 국내외 9개 증권사에 대해 시세 조종 및 시장질서 교란 혐의로 483억원의 과징금 부과를 밀어붙이면서다. 적법하게 역할을 수행했다가 졸지에 ‘시세조종 주범’ 취급을 받게 된 증권사들은 반발하고 있다. 1년 가까이 제도 운영이 중단되면서 투자자들은 유동성 부족에 따른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는 13일 금감원이 올린 시장조성자 제재 안건을 오랜 시간 심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증선위가 제재안을 의결하지 못한 정확한 이유는 공개되지 않았다. 증선위에 앞서 약 두 달간 진행된 자본시장조사심의위원회(자조심)에서는 시장조성자에 대한 제재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자조심은 증선위가 제재안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 자문 의견을 제시하는 기구다.
시장조성자제도는 유동성이 부족한 종목에 대해 매매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돕는 제도다. 한국거래소와 계약을 맺은 증권사들이 매수·매도 양방향 호가를 촘촘하게 내주는 식이다. 두터운 호가층을 만들어 투자자가 원하는 가격에 주식을 매매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가가 급등락할 때 가격 변동성을 줄여주는 ‘완충 장치’ 역할도 한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 시장에도 도입돼 있다.
금감원은 일부 증권사가 지나치게 많은 주문 정정이나 취소로 시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조성자들의 주문 정정 및 취소 비율이 해외 사례와 비교해 특별히 높다는 것을 증명하진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빠르게 변화하는 가격을 따라가며 호가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체결되지 않은 이전 주문에 대한 정정 및 취소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금감원 내부에서도 제재안을 놓고 이견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은보 전 금감원장은 지난해 말 “과징금이 과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추가적 검토를 진행하겠다”며 한발 물러서기도 했다. 금감원은 시간만 끌다 올 4월이 돼서야 금융위에 제재 안건을 올렸다. 거래소는 약 10개월간 시장조성자 제도가 중단되면서 일부 종목에서 유동성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고 소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한국 시장의 규제 불확실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금감원의 무리한 결정이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작용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