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끝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
조선시대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초상화에는 대상의 모습뿐 아니라 영혼까지 담겨야 하니, 이를 위해서는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해 동서고금의 많은 이야기가 초상화를 영혼과 결부된 존재로 표현하는 데에도 비슷한 생각이 깔려 있다. ‘초상화는 영혼이 담긴 특별한 그림’이란 철학이다.
고상우 작가(44)는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멸종 위기 동물들을 털끝 한 올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화면 중심에서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는 인물의 눈, 정적인 수직 구도, 좌우대칭의 구성 등 인간이나 신을 그릴 때만 사용됐던 전형적인 초상화 형식을 동물에게 적용했다. 동물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건 동서양 미술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시도. 그의 이전 작품값이 갈수록 뛰고 팝스타 마돈나와 세계 최대 헤지펀드회사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를 이끄는 레이 달리오 등 유명인들이 그의 작품을 사들이는 것도 이런 파격과 독창성을 인정받아서다. ○그림으로 외치는 ‘동물 보호’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포에버 프리(Forever Free):그러므로 나는 동물이다’는 고상우 작가의 디지털 회화 34점과 드로잉 138점, 영상 2점 등 총 170여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다. 세계자연기금(WWF)이 공동 주최자로 이름을 올렸고, LG디스플레이와 카카오브레인이 전시를 후원했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가로·세로 크기가 150㎝에 달하는 호랑이 그림들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일부러 그림 속 동물의 눈높이를 관객의 눈높이와 맞췄다”며 “동물은 인간보다 열등한 종이라는 생각을 흔들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호랑이들의 모습은 털 한 올 한 올까지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생생한지 사진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사진은 참고 자료로만 썼을 뿐, 100% 디지털 펜으로 그린 그림이다. 고 작가는 “여러 작품을 동시에 그리는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평균 반년가량이 걸린다”며 “작품 한 점의 파일 크기만도 약 10GB에 달할 정도로 그림이 세밀하기 때문에 가로·세로 5m 크기로 출력해도 품질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호랑이 외에도 전시장에서는 사슴과 표범, 코끼리 등 다양한 동물 그림을 만날 수 있다. 동물들의 눈에 공통적으로 그려진 핑크빛 하트와 별은 마음, 심장, 사랑, 희생, 생명을 상징한다. 작가가 가장 많은 공을 들이는 곳은 동물의 눈동자다. “눈은 우주와 자연, 동물과 인간,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설명이다. ○“멸종위기 동물에 동질감”고 작가는 열여섯 살이던 199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서 사진과 퍼포먼스를 전공했고, 자신이 겪은 인종차별의 아픔을 표현한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다. 사진의 색과 음영을 바꿔 푸른 색조로 만들고 이를 통해 우울감과 소외를 표현하는 게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작가는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시절 동양인의 노란 피부를 반전하면 파란색이 된다는 사실에서 착안했다”고 말했다.
동물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들이 파란 색조를 띠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 작가는 “멸종 위기 동물들을 보고 백인이 지배하는 서구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동양인을 떠올렸다”며 “동물들도 인간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약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서구권에서 인기가 많은 게 특징이다. 인종차별과 자연보호 등 서구 컬렉터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WWF를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들은 동물 보호 관련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를 찾는다. 10월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소속 화랑인 ‘완루이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전시장에서는 카카오의 인공지능(AI) 연구전문 자회사인 카카오브레인이 마련한 ‘호랑이 깨우기’ 프로그램도 체험해볼 수 있다. 관람객들이 컴퓨터에 단어를 입력하면 이를 기반으로 호랑이 이미지를 자동으로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다. 전시는 8월 2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