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쓴 소설에는 기억해둘 만한 구절이 꼭 있다.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다.” 작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 한 구절이다.
36년 전 ‘탑건’의 톰 크루즈가 올해 환갑이 돼 돌아온 만큼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우리도 1980년대에서 2020년대로 건너왔다. 시간은 수많은 이들을 세상 무대에서 퇴장시켰고, 시대는 산업화 민주화 이후 나라가 지향하는 방향을 묻고 있다.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 나라 수준은 정치와 공중화장실을 보면 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화장실은 환골탈태했다. 반면 정치는 아직도 도돌이표다. 이건희 회장이 “정치는 4류”라고 일갈한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이제는 5~6류라는 말까지 나온다. 총선 때마다 국회의원 절반이 물갈이돼도 매양 똑같다. 아니 더 나빠지고, 더 뻔뻔해져간다.
먼저 5년 만에 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을 보자. 국민은 선거 3연패(敗)를 안기며 20년 집권하겠다던 민주당에 반성과 숙고를 요구했다. 그러나 지고 또 지고도 여전히 ‘졌잘싸’ 프레임에 갇혀 정신승리 중이다. ‘~빠’와 ‘정치 훌리건’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혁신할 기회마저 걷어차고 있다. 몰락 시발점이 된 ‘조국의 강’은 아직도 넓고 깊다. 여기에 검수완박, ‘짤짤이’, 개딸 등 지류가 보태져 민심과 더 멀어졌다. 참으로 저렴한 처럼회를 보면 586 운동권 출신 같은 세대 문제만도 아닌 것 같다. “또금만 더 해두때여”에선 기괴함마저 느껴진다.
대선을 간신히 이긴 국민의힘은 어떤가. 탄핵 후 지리멸렬하다 문재인 정부의 무능 덕에 기사회생했다. 그러자 도긴개긴 치고받고 하는 옛날 버릇이 또 나온다. 자기들이 잘나서 유권자들이 표를 준 줄 안다. 경제·민생에 드리운 시커먼 먹구름, 뚝뚝 떨어지는 지지율에도 30대 당 대표와 윤핵관의 권력투쟁만 도드라진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여 만에 벌써 피로감을 느낄 정도다.
대립하는 좌우 정당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실력 있는 여당이 야당을 각성시키고, 원칙과 상식을 갖춘 야당이 여당을 긴장시켜 함께 발전하는 게 최선이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가 영국을 재건하자, 토니 블레어는 ‘제3의 길’로 낡은 노동당을 되살려 냈듯이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당들은 치열하게 싸우지만 서로를 거울 삼아 나라와 정치 발전을 이뤄본 적이 있나 싶다. 스코어는 늘 초접전인데 호쾌한 타격과 호수비가 아니라 볼넷과 실책만 남발하는 짜증나는 야구 같다. ‘누가 더 못하나’ 경쟁이다. 좌파는 자정능력을 상실했고, 우파는 방향감을 잃고 헤맨다.
공히 잘 하는 것이라곤 국민 들먹이며 사익을 공익으로 위장하고, 비열한 짬짜미로 대한민국 최고 기득권이자 특권층으로 군림하는 것뿐이다. 그런 꿀단지 주위로 출세와 영달이 인생 목표인 군상들이 파리떼처럼 모여든다.
바야흐로 세계의 거대 조류가 급격히 방향을 바꾸고 있다. 탈세계화, 기술패권 전쟁, 블록화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 더욱 치명적이다. 정치, 안보와 경제가 한 묶음이다. 이런 세계사적 대전환의 기운을 장삼이사도 느끼는데, 여야 정치꾼들의 눈에는 다음 선거만 보이는 모양이다. 시대를 읽는 안목도, 대처할 실력도, 극복하려는 의지도 안 보인다. 아무리 못해도 상대가 더 못하면 권력을 쥘 수 있는 ‘상대평가 정치’의 현주소다.
전 정권의 최대 과오는 국가의 근간을 흔들어놨다는 데 있다. 안보, 외교, 경제, 세제, 부동산, 에너지, 재정 등 전방위 부실화에 대해 국민은 정권 교체로 응수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이뻐서’ 선택받은 게 결코 아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라는 주문이다. ‘전 정부보단 낫다’는 수준이면 ‘그놈이 그놈’이란 소리밖에 못 들을 것이다.
“일상은 백 마디 다짐과 천 번의 맹세보다 더 억세고 단단하다”(김별아 ‘미실’). 먼저 국민의 ‘먹고사니즘’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어떤 시급한 구조개혁도 힘을 받기 힘들다. 그런 연후에야 자유민주주의와 민간주도 경제도 가능하다. 지금 같아선 장기 하강국면에서 일시 기술적 반등이 있을지 몰라도 더 큰 추락이 불가피하다. 이 나라가 시행착오와 시대착오에 빠져 헤맬 시간이 있기나 한가. 이제는 국민이 ‘이게 정치냐’라고 엄중히 따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