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잔치, 120년 만에 무대로

입력 2022-07-12 18:07
수정 2022-07-13 00:29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황태자 시절 아버지 고종에게 똑같은 내용의 상소를 다섯 번이나 올렸다. 상소 내용은 다름 아닌 “진연(궁중 잔치)을 열자”는 것. 순종이 상소를 올렸던 임인년(1902년)은 대한제국을 노리는 열강 간 다툼으로 인해 나라와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때였다.

“나라가 어지러운데 무슨 잔치냐”며 매번 거절했던 고종은 결국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진연을 통해 황실의 위엄을 세우는 동시에 대한제국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대외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대한제국을 지키겠다는 고종의 ‘마지막 몸부림’과도 같았던 ‘임인진연’이 120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된다. 1902년 음력 11월 8일 덕수궁에서 열렸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잔치’의 무용과 음악을 국립국악원이 그대로 복원해 무대에 올린다. 120년 전 궁중잔치 복원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12일 서울 정동 덕수궁 정관헌에서 열린 임인진연 제작발표회에서 “올해 임인년을 맞아 자주국가를 염원한 임인진연의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해 공연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임인진연은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망육순(望六旬·50세를 넘겨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인 51세를 기념하는 잔치였다. 대내외적으로 황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한 국가적 의례기도 했다. 황제와 남성 신하들이 주로 참석해 공식 행사 성격을 띠는 ‘외진연’과 황태자, 황태자비, 황실 종친 등과 함께 예술과 공연을 즐기는 ‘내진연’으로 이뤄졌다. 이번 공연에서 재현하는 건 내진연이다.

김 원장은 “궁중잔치는 당대에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과 무용을 선보이는 자리”라며 “찬란한 궁중예술을 복원하고 소개하는 작업은 국립국악원이 해야 하는 일이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잔치가 끝난 지 120년이 지났는데도 복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한제국의 꼼꼼한 기록문화가 있다. 대한제국은 ‘진연의궤’를 통해 임인진연 준비 과정부터 최종 결산까지 4권4책 분량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임인진연 도병(그림병풍)’이란 궁중기록화도 남겼다. 이들 기록물에는 행사 절차에 대한 설명부터 무용 동작, 악기, 연주복, 잔치에 사용된 그릇과 장식품, 심지어 상에 올라간 떡의 개수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다. 황제의 시선으로 즐기는 궁중예술국립국악원은 이번 작품의 포커스를 ‘충실한 재현’에 맞췄다. 관객석의 위치는 황제가 앉는 자리로 잡았다. 황제의 시선으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주렴(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 등을 활용해 황제의 공간과 무용·음악의 공간을 분리, 실제 진연과 비슷하게 무대를 꾸민다.

연출 및 무대 디자인을 맡은 박동우 홍익대 교수는 “음악과 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복잡하고 긴 의례와 음식을 올리는 절차 등은 과감하게 생략했다”며 “진연을 90분 분량의 공연 예술로 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리는 예법 절차에 맞춰 궁중무용과 음악을 선보인다. 황제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 ‘수제천’ ‘헌천수’ 등 궁중음악이 재현된다. 음악에 맞춰 황제가 입장할 때 추는 ‘봉래의’와 퇴장할 때 추는 ‘선유락’을 비롯해 ‘헌선도’ ‘몽금척’ ‘가인전목단’ ‘향령무’ 등 궁중무용 여섯 가지가 무대에 오른다.

국악원 관계자는 “그동안 각각의 궁중음악과 무용을 개별 무대를 통해 선보인 적은 있지만 진연 절차로 묶어 하나의 무대에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추후 덕수궁 측과 협의해 실제 잔치가 열린 관명전 터에서 공연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다음달 12~14일에 열린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