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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다이얼 전화기가 놓여있다. 벨이 울린다.
“누군가의 부재중 통화를 받아보세요.”
수화기를 들면 이름 모를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라고 부르다 한참을 침묵하는 목소리, 먼저 떠난 아빠에게 처음으로 ‘아버지’라 불러보는 떨리는 목소리, 헤어진 연인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건네는 한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 4년 전 세상을 등진 딸에게 ‘김 서방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나 봐. 난 좀 섭섭한데, 너는 괜찮아?’라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깊은숨만 내쉬는 무언의 목소리….
그 옆 공중전화 부스엔 이렇게 써있다.
“차마 말하지 못해 부재중 통화가 돼버린 이야기. 당신에게도 있나요?
이제 누군가는 들어줬으면 하는 당신의 ‘하지 못한 말’을 남겨주세요.
당신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그 어떤 말도 괜찮습니다.”
9만7934통.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라는 전시 프로젝트를 통해 3년간 모인 목소리다. 2018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서울 석파정 서울미술관 등에서 오프라인 전시를 거쳤다. 이 중 3000통은 2019년 2월 지구 최남단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놓아졌다. 올해 4월엔 10만 통, 800시간 분량의 목소리가 아프리카 사하라에 흩어졌다.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된 이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다. 1522-2290 번호로 지금도 매일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시골 고교에선 “우리 학생들에게 수화기를 건네줘도 되겠느냐” 문의가 오기도 한다.
우리가 하지 못한 말들을 세상의 끝에 놓아주고 있는 이는 설은아 작가(48)다. 서울 서교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휴대폰 화면을 쓸어올리고 내리는 길이가 하루평균 150m에 달하는데, 거기엔 과장된 기쁨과 공허한 말들만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진정한 소통 한 조각이 이 세상 혹은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도 했다.
○소통 과잉의 시대에 말하는 진짜 연결“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는 ‘절망’이 존재하지 않아요. 이 시대의 소통은 ‘좋아요’로 요약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진정 원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아니에요. 연약하고 숨기고 싶은 모습까지 모두 내보일 수 있는 상태가 돼야 우린 세상과 친밀해질 수 있어요.”
그래서 그는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어떤 비판이나 충고 없이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이 세상에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뭘까 생각하다, 결국 허용이라는 답을 내렸어요. 첫 번째 허용은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 두 번째는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주는 것, 마지막으로 그것을 세상에 놓아주는 세 단계의 허용을 생각했습니다.” ○“나도 아팠다, 하지 못한 말들 때문에”그는 30대까지 광고업계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다. PC통신에서 닷컴 시대가 화려하게 열리던 1999년. 국내 웹아트 1세대 작가로 데뷔했다. 웹사이트 ‘설은아닷컴’으로 제1회 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다. 포스트비쥬얼이란 디지털 광고 대행사를 세워 2004년 칸국제광고제에서 한국 최초로 사이버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영화계에선 최초로 인터랙티브 광고를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엽기적인 그녀’ 등의 웹사이트가 그의 손을 거쳤다.
나이키, 이니스프리, 유한킴벌리 등의 디지털 캠페인을 맡았고 70여 차례 해외 광고제에서 수상했다. 2019년엔 ‘대한민국 디자인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년간 ‘누구나 알 만한 광고’를 숱하게 제작했던 그는 홀연 은퇴를 선언했다.
“도넛 같았어요. 겉은 빵빵한데 속은 뻥 뚫린. 갑자기 모든 게 거짓처럼 느껴지는 기분이 마흔 살을 앞두고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진짜 사춘기랄까. 집에서의 나도, 사회에서의 나도 누군가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해준 틀에 맞춰 살고 있는 것 같았죠. 10점짜리 나도, 50점짜리 나도 받아들이고 인정했어야 하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일을 차츰 접으며 명상과 독서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침잠의 시간이 지나자 주변이 보였다.
“나만 이런 건 아니었을 텐데. 왜 중년에 겪는 삶의 소용돌이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걸까요. 사람들이 하지 못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마침내 꺼낸 말들, 세상의 끝에 영원히 살다20년간 해온 일을 그만두고 작가로 다시 살게 된 그는 “지금 행복하다”고 했다. 타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은 쉽지 않다. 데이터에 저장된 10만 건의 목소리 중 유의미한 것들을 골라내고 정리하고, 테이프에 녹음해 세상의 끝에 놓아주는 일은 고되다. 오로지 혼자가 돼 수화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하나하나 소중하다.
“목소리를 남긴 사람은 10만 명인데, 이걸 들어준 사람은 54만 명이 넘었어요. 여행엔 재주가 없는 사람이지만 세상의 끝에 놓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람을 타고 돌아서 다시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겠죠. 어쩌면 영영 닿지 않을 거고요. 그러면 영원히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잖아요.”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바람 속에 놓아주는 퍼포먼스 필름은 세계 3대 단편영화제인 탐페레국제단편영화제에서 국제 경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더 오래 이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쌓여가고 있는, 하지 못한 부재중 통화들을 모아 다음은 아이슬란드로 향한다.
김보라/구은서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