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3대 항공사가 유럽 에어버스로부터 항공기 292대를 370억달러(약 48조원)에 도입하는 초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글로벌 항공기 시장의 큰손인 중국이 그동안 자국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던 미국 보잉을 미·중 갈등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분석이다. 중국 관영매체는 ‘바이든은 보잉의 좌절에 주목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이번 계약이 미국의 중국 기업 제재에 대한 보복임을 명시했다.
보잉 앞서가는 에어버스3일 경제매체 차이신 등에 따르면 중국 3대 국유 항공사인 동방항공, 남방항공, 에어차이나는 에어버스와 각각 100대, 96대, 96대의 A320네오 항공기 구매 계약을 지난 1일 체결했다. 3개사 모두 2027년까지 매년 수십 대씩 분할 도입하는 조건이다.
A320네오는 에어버스의 주력 중형기로 최대 정원은 194명이다. 보잉의 737맥스, 중국 항공기 제조사인 상페이의 C919 등과 경쟁하는 기종이다. 737맥스가 잇단 추락 사고로 각국에서 운행이 중단된 뒤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지난 2월 말 기준 글로벌 수주 잔량은 7800여 대로, 737맥스의 4800여 대를 큰 폭으로 앞섰다.
중국 민용항공국은 지난해 말 737맥스의 운항 재개를 허가했으나 아직 실제 노선에는 투입되지 않고 있다. 3월에는 동방항공 소속 보잉 737-800기가 추락해 13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중국 항공사들은 보잉 항공기의 안전성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남방항공은 5월에 보잉 737맥스 100여 대 도입 계약을 취소했다. 남방항공은 2024년까지 보잉 항공기 구매 계획을 181대에서 78대로 축소했다. 유럽에 손 벌린 중국중국의 에어버스 항공기 대량구매는 미국에 대항하는 조치이자 유럽에는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보잉은 이번 계약 직후 성명을 통해 “지정학적인 차이가 미국 항공기의 (중국) 수출을 제약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항공사가 에어버스를 선택한 것은 성능과 안전성 등에 기반한 결정이며 보잉은 특히 중국에서 안전성 문제를 노출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 정부는 화웨이나 신장위구르 지역 기업들을 정치적 이유로 제재해왔다”며 “이번 계약도 미국의 지정학적 조치로 시장의 신뢰와 자유무역이 손상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2018년 무역분쟁 발발 이후 미국이 자국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올릴 때마다 보복 조치를 시사해왔다. 2020년 10월 보잉과 록히드마틴 등을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이유로 ‘신뢰할 수 없는 기업’ 리스트에 올렸다. 또 지난해 8월에는 자국 국민과 기업에 외국의 제재에 대응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하는 ‘반(反)외국제재법’을 제정했다.
중국이 맞제재 의사를 밝힐 때마다 보잉, 애플 등 중국 시장 의존도가 큰 기업들이 대상으로 거론돼왔으나 구체적인 조치는 거의 없었다. 이번 항공기 대량구매는 보복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유럽과 반중 전선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유럽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중국과 유럽연합(EU)은 2020년 말 중국이 유럽 기업에 시장을 대거 개방하는 내용의 투자협정 체결에 합의했으나 이후 홍콩, 신장 등의 인권 문제가 부상하면서 실제 체결은 중단된 상태다.
보잉에 따르면 2040년까지 세계에서 4만3000대의 신규 항공기가 발주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중국이 20%인 8700대를 차지할 전망이다. 에어버스가 당장은 우위를 점했지만, 중국이 자국산 여객기를 본격적으로 시장에 투입하고 있어 향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베이징=강현우 특파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