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미술계의 ‘올림픽’이라면, 스위스 바젤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 미술장터 아트바젤은 ‘챔피언스 리그’다. 세계 최고 화랑들이 대표작을 내걸고 ‘진검승부’를 펼치는 무대여서다. 축구의 손흥민처럼 ‘한국 미술선수’들은 지난달 14~19일 열린 올해 아트바젤을 뜨겁게 달궜다. 영국 화이트큐브 갤러리(박서보)·앤니주다파인아트(백남준)·리슨갤러리(이우환), 프랑스의 알민 레쉬(하종현)·샹탈 크루젤(양혜규) 등 세계적인 화랑들이 한국 작가 작품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번 아트페어에 참여한 국제갤러리는 유영국(약 10억원)과 박서보(약 5억원), 양혜규와 강서경(각각 1억원) 등의 작품을 고가에 판매했다. 갤러리 관계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한국 작품의 몸값이 높아지고 있다”며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 미술계의 ‘인싸’(인사이더·주류)가 됐다”고 말했다. ○커지고 높아진 한국 미술
한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부로 들어섰다는 건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만 봐도 알 수 있다. 리처드 암스트롱 미국 구겐하임미술관 관장, 프랜시스 모리스 영국 테이트모던 관장 등 수많은 미술계 명사가 빠짐없이 한국관을 찾아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본전시 작가로 참가한 이미래·정금영의 작품도 호평을 받았다.
한국 시장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괄목상대’란 말로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2017년 4942억원이던 시장 규모가 지난해 9223억원으로 4년 만에 두 배로 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만큼 한국미술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오는 9월 세계적 아트페어인 ‘프리즈’가 서울에서 열리는 만큼 올해 시장 규모는 작년을 크게 능가할 전망이다.
따지고 보면 미술시장이 크다고, 화가가 많다고 ‘미술 강국’이 되는 건 아니다. 좋은 작품을 볼 줄 아는 ‘눈 밝은’ 컬렉터와 후원자 기반이 넓어야 하고, 이를 유통할 갤러리도 많아야 한다. 이에 앞서 누구나 손쉽게 미술을 배울 수 있는 인프라부터 구축돼야 한다. 1950년대 호황을 타고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떠오른 미국, 198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젊은 작가(yBa·young British artists)를 내세워 유럽 미술의 강자가 된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미술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미술대학은 몇몇 천재를 제외하면 부잣집 자녀들만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중산층도 큰 부담 없이 자식을 미대에 진학시킬 수 있게 됐다. 동네마다 생긴 미술학원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이들이 서울대, 홍대 등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했다. 현대미술 거장인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런던 골드스미스대에서 데미언 허스트 등 ‘yBa 대표주자’들을 키워낸 것과 비슷하다.
먹고살 만해지자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과 ‘보는 눈’도 덩달아 높아졌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미술은 소득 수준이 오를 때 소비 규모가 가장 많이 늘어나는 예술 장르다. 소득 수준이 2만달러인 나라에선 1년에 한 번 이상 미술관을 찾는 이가 전체 국민의 17%에 그치지만, 5만달러인 나라에서는 65%로 높아진다. ○후원자·미술생태계 ‘지원 사격’삼성의 리움미술관과 현대자동차 정몽구 재단 등 기업도 한국 미술의 성장을 이끈 주역 중 하나다.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1970년대 무명이었던 유영국의 작품을 사주며 “추상화도 이 정도면 꽤 괜찮다”고 격려한 건 한국 미술계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일화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잭슨 폴록이 슈퍼스타가 된 배경에 ‘전설의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이 있었듯이 미술은 후원자 없이는 성장하기 어렵다”며 “한국은 대기업이 이런 역할을 해준 덕분에 미술시장이 빠르게 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아트페어를 돌아다니며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사주는 경영자가 여럿 있다”고 덧붙였다.
갤러리와 평론가 등 미술 인프라도 성장에 한몫했다. 2015년 단색화로 ‘미술 한류’를 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등을 묶어 미술 애호가들에게 설득력 있게 호소한 평론가와 갤러리가 있었다. 영국 사치갤러리의 주인인 찰스 사치가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yBa 작가들을 세계 미술의 ‘뜨는 별’로 밀어올린 과정과 비슷하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