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건 지난해부터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남긴 ‘이건희 컬렉션’에 대거 포함된 그의 작품이 공개되고,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관련 전시마다 방문해 유영국 작품 앞에서 인증샷을 남긴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RM을 따라 전시장을 찾은 20대 관람객들은 곧바로 유영국의 ‘찐팬’이 됐다. SNS에 “1916년생 작가가 그린 그림인데 지금 봐도 세련됐다”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유영국의 작품은 이처럼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게 됐지만, 정작 화가의 생전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그림은 당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시대를 한참 앞서간 탓에 거의 팔리지 않았다. 화가로는 한창나이인 61세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간 병마에 시달렸다. 그는 어떻게 이런 고통을 견디며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일궈냈을까. 20주기 기념 ‘미술관급 전시’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유영국 20주기 기념전 ‘Colors of Yoo Youngkuk’(유영국의 색채)은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전시다. 시기별 대표 회화작품 68점과 드로잉 21점, 작가의 활동기록을 담은 기록물 등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 전반을 아울렀다. 개인 소장가를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등 여러 기관에서 작품을 빌려와 걸었다.
191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1938년 일본 도쿄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하고 현지 화단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귀국했다. 이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선을 몰기도 했고 양조장도 경영했다. 그러다 1964년 48세의 나이로 전업 작가가 된 뒤 미술운동이나 관련 단체 활동을 모두 그만두고 독창적인 조형과 색채 실험에 온 힘을 기울였다.
총 세 관으로 구성된 전시 중 K1(1관)과 K3(3관)가 이 시기 작품을 다뤘다. K1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비쳐보이는 삼청동의 풍경과 함께 작가의 대표작 및 1950~1960년대 초중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K3에는 전업작가로 변신한 뒤인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작품을 걸었다. 기하학적 추상과 조형 실험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작가의 넘치는 의욕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다. 가족의 사랑이 만든 ‘조화와 평화’
유영국은 평소 입버릇처럼 “60세까지는 기초 공부를 좀 하겠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61세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이후 유영국은 총 여덟 번의 뇌출혈을 겪는 등 극심한 병고(病苦)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색채와 구도의 완급을 비롯한 작품의 완성도는 갈수록 높아졌다. K2(2관)에선 그가 1970년대 후반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린 ‘원숙기’ 작품들과 관련 기록물을 만날 수 있다.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조화롭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건 가족의 사랑 덕분이다. 부인인 김기순 여사(102)는 평생 남편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남편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뒤에서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으로 응원했다고 한다. ‘Work’(1977)에는 이런 아내에 대한 작가의 고마움과 사랑이 담겼다. 작가가 1977년 경북 영주 부석사에서 아내와 함께 본 사과나무 두 그루를 그렸다. 빨갛고 노란 색채와 부드러운 조형이 인상적이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이용우 홍콩중문대 문화연구학과 교수는 “유영국이라는 작가의 삶, 그를 지탱해준 가족의 존재를 조망한 전시”라며 “관람객들이 그림에 담긴 따스한 생(生)의 빛을 만끽했으면 한다”고 했다. 전시는 8월 2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