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금고’로 유명한 스위스의 글로벌 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마약상의 돈세탁 기구로 전락했다. 불가리아 마약 밀매 조직의 돈세탁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것. 스위스 금융업체가 돈세탁 범죄로 처벌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27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스위스 연방형사법원은 크레디트스위스가 2007년 7월~2008년 12월 불가리아 마약 밀매 조직이 돈세탁할 때 이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200만스위스프랑(약 27억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계좌 감시를 소홀히 한 탓에 재산 은닉이 가능했다는 이유에서다. 블룸버그는 판결에 대해 “스위스 은행이 돈세탁 범죄에 연루돼 형사처벌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라며 “역사적인 순간이다”라고 보도했다.
스위스 법원은 계좌에 남아있는 범죄조직의 예금 1200만스위스프랑(약 162억원)을 몰수하고 회수 불가능한 1900만스위스프랑(약 257억원)은 CS로부터 추징하기로 결정했다. 은행 규정을 초과한 현금을 정기적으로 예금에 납입한 직원에 대해선 20개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스위스 검찰은 불가리아 출신 마약상들이 2004년부터 5년 동안 수 톤(t)에 달하는 코카인을 유럽으로 밀수했다고 밝혔다. 주로 운반선과 항공기를 활용했다. 코카인이 가득 찬 고무공을 당나귀에게 먹여 밀매하기도 했다. 이들은 거래자금의 출처를 숨기려 크레디트스위스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2020년 크레디트스위스를 기소했다.
스위스 연방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이 범죄와 관련된 자금의 출처와 계좌를 심사해야 하고, 이를 무시하게 되면 해당 은행을 형사고발 할 수 있다. 500여쪽에 달하는 스위스 검찰의 기소장에선 크레디트스위스 직원은 50만유로(약 6억 8000만원) 이상 정기적으로 납입되는 현찰을 계좌에 납입해줬다.
크레디트스위스는 검찰이 당시 적용되지 않은 법령과 원칙을 근거로 내세웠다며 판결에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또 돈세탁 방지체계를 꾸준히 점검하고 있으며 관련 규제 변화에 맞춰 강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은 크레디트스위스가 겪은 각종 스캔들에서 벗어나려는 시점에 나왔다. 이미 기소당할 위기에 놓여있어서다. 스위스 제네바 검찰은 지난 16일 크레디트스위스가 2008년~2014년 돈세탁을 방조한 증거를 8가지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수사를 마친 뒤 곧 기소할 거라고 경고했다.
CS에 직격타였다. 파트리스 르스코드통 전 크레디트스위스 직원이 2010년 초부터 동유럽 고액 자산가들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다 발각돼 2018년 5년 징역형을 받았고 202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CS는 고액 자산가들이 벌인 손해배상소송에서 승소했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계속되는 스캔들 때문에 CS를 감시 대상으로 지정했다.
안팎으로도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지난해 한국계 미국인 투자자 빌 황의 아케고스캐피털과 영국 그린실캐피털과의 거래로 인해 천문학적인 투자 손실을 기록했다. 지난 1월엔 안토니우 오르타 오조리우 CS 의장이 코로나19 자가격리 조치를 위반한 혐의로 인해 자진 사임했다.
구설수에 오른 크레디트스위스의 주가는 경쟁사에 비해 낙폭이 컸다. 올해들어 크레디트스위스 주가는 38% 하락했다. 같은 기간 독일의 도이치방크는 24%, 프랑스의 BNP파리바는 21% 하락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