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04년 만에 디폴트…1억달러 외화 이자 못 갚았다

입력 2022-06-27 17:35
수정 2022-06-28 01:30
러시아가 외화 표시 국채에 대한 이자 지급에 실패하면서 104년 만에 처음으로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졌다. 상환 능력은 있지만 서방의 제재로 이자 지급 통로가 차단된 데 따른 것이다.

2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날까지 달러 및 유로 표시 국채 두 건에 대한 이자 1억달러(약 1300억원)를 투자자에게 지급하지 못했다.

이번 디폴트는 예견된 일이었다. 미국 등 서방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로 러시아 주요 은행을 국제 금융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에서 퇴출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은 외화 거래가 막힌 러시아가 국채 원리금과 주식 배당금을 미국 채권자들에게 상환할 수 있도록 한 유예 조치도 지난달 말 중단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외채 비중이 높지 않아 한국 등 글로벌 금융시장이 받는 충격은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버그는 “러시아는 이미 국제 금융시장에서 배제된 상황이어서 이번 디폴트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전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는 디폴트 상태나 마찬가지였다”며 “러시아로부터 받지 못한 돈이 없는 한국도 직접적인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1918년 혁명 주도 세력인 볼셰비키가 “차르(황제) 체제의 부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외채 상환을 거부한 바 있다.러, 이미 국제금융시장 퇴출…"큰 충격 없어"
이자 1억弗 달러로 못냈지만, 에너지·자원 수출로 자금력 탄탄“러시아가 1918년 볼셰비키 혁명 후 처음으로 외화 표시 국채에 대한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제재 이후 세계 금융시스템에서 더욱 소외됐다.”

러시아가 외화 표시 국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지 못한 26일(현지시간) 가디언 등 외신들은 이같이 보도했다. 러시아는 이날까지 달러 및 유로 표시 국채 두 건에 대한 이자 1억달러(약 1300억원)를 지급하지 못했다. 지난달 27일까지 이자를 갚아야 했지만, 유예기간 30일이 지난 이날에도 이자를 주지 못했다. 러 정부는 디폴트 부인러시아는 1918년 외화 표시 국채에 대한 디폴트에 빠졌다. 당시 볼셰비키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은 “차르(황제) 시대의 부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외채 상환을 거부했다.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 선언은 외화 표시 국채가 아니라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 표시 국채에 대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공식 디폴트 선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공식 디폴트는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이 결정하는데, 서방 국가들의 제재 여파로 이들 업체는 러시아 채권에 대한 평가를 중단한 상태다. 다만 미상환 채권 보유자의 25%가 동의하면 ‘디폴트 사건(Event of Default)’이 발생했다고 부를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 수출로 자금력이 탄탄하고 상환 의지를 갖추고 있는 만큼 디폴트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지난 23일 “러시아에 ‘디폴트’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서방 국가들이 인위적인 장벽을 만들었다”며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다”고 비판했다. 또 “누구나 원하는 대로 디폴트를 선언할 수 있지만 지금 무슨 일(금융 제재 등)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절대 디폴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BBC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가 발행한 국채 중 400억달러어치가 달러 또는 유로화로 표기됐다. 해외 투자자들이 이 중 절반을 보유하고 있다. 외화 접근이 차단된 러시아는 루블화로 국채 원리금을 갚겠다는 입장이다. 러시아 재무부는 23~24일 새로운 루블화 지급 규정에 따라 4억달러에 달하는 이자를 국채 투자자에게 지급했다. 블룸버그는 “그러나 어느 채권 상환 조건에도 루블화로 결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루블화로 국채 원리금을 갚아도 계약 위반에 따른 디폴트로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 시장 영향 크지 않을 듯”러시아 국채 투자자들의 향후 대응에도 관심이 쏠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채권 보유자의 25%가 즉시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이른바 ‘가속 조항’을 발동하면 이들은 러시아 정부에 대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소송은 상환일로부터 3년 이내에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끝 모를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채권자들이 소송을 걸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블룸버그는 “투자자들이 즉시 행동에 나설 필요가 없다”며 “결국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완화되길 바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진행 상황을 지켜보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시장에선 러시아의 상환 능력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러시아가 스스로 지급 실패를 선언한 것이 아니고 미국의 제재 탓에 달러로 지급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현재 러시아는 스스로 빚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해당 국채에 대해 계약 조건을 위반했는지를 국제파생협회(ISD)에서 살펴보는데 그 판단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ISD가 아직 ‘지급 실패’라고 판단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러시아 디폴트로 인한 세계 경제 파장은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러시아의 외채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세계 은행들의 러시아 익스포저는 1047억달러에 달했다. 이 중 한국 은행들의 러시아 익스포저는 14억달러로 전체의 1.4%에 불과했다.

허세민/조미현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