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와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이 《넛지》를 펴낸 이후 세계에 ‘넛지 열풍’이 불었다. 공중화장실 남자 소변기에는 파리 스티커가 유행처럼 붙었고, 밟을 때 소리가 나는 피아노 계단도 곳곳에 생겼다. 미국 영국 호주 등 각국은 넛지를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명저(名著)’ 반열에 오른 《넛지》가 전면 개정판인 《넛지: 파이널 에디션》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2020년 출간된 이 개정판은 절반가량이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바뀌었다. 넛지의 반대인 ‘슬러지’, 중요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스마트 공개’ 등의 개념이 새로 등장한다. 사례도 업데이트했다. 저자들은 “예전 책을 읽은 독자라도 새로운 주제를 꽤 많이 만날 것이고, 어쩌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파이널 에디션(최종판)’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일종의 넛지다. 추가 개정판은 없다고 스스로 못 박는 ‘자기결박 전략’이다.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른다’는 뜻을 지닌 단어다. 경제학적으로는 ‘부드러운 개입’을 의미한다. 저자들은 이를 ‘자유지상주의적 간섭주의’라고 표현한다. 각자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되 그 선택이 좋은 방향을 향하게끔 은근하게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초등학교 구내식당에서 과자나 디저트를 없애기보다는 음식 배열 순서를 바꿔 과일이나 샐러드를 앞에 두는 식이다.
넛지는 행동경제학에서 출발했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무조건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처음 제공된 정보에 크게 영향받는 ‘기준점 편향’,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에 판단이 좌우되는 ‘가용성 편향’, 이득보다 손실에 더 민감한 ‘손실회피 편향’ 등은 이제 많은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해졌다.
책은 이런 기본적인 행동경제학 개념들을 간단히 설명한 뒤 본론으로 들어간다. ‘어떻게 인간 행동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것이냐’다. 일반적인 행동경제학 관련 책이 이론서라면 《넛지》는 실용서다.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조금만 조건을 바꿔도 인간의 행동이 달라진다면 좋은 방향으로 선택을 유도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발상이다.
넛지 적용 사례는 수없이 많다. 제시간에 안 일어나면 알람을 울리며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바퀴 달린 알람 시계, 마감을 안 지킬 때 벌금 내기, 자동차 안전벨트 경고음, 우측 통행 나라에서 온 관광객을 위해 횡단보도 바닥에 ‘우측을 보세요’라고 쓴 영국 런던, 날짜가 적힌 약통, 퇴직연금 자동 가입 제도 등이다.
안 좋은 방향으로 넛지를 활용하는 ‘나쁜 넛지’도 있다. 저자들은 이를 슬러지라고 이름 붙였다. 질척질척하게 젖은 진흙을 뜻하는 말이다. 몇몇 구독 서비스는 클릭 몇 번으로 간단히 가입할 수 있다. 하지만 해지하려면 꼭 전화를 해야 한다. 면도기나 프린터를 싸게 팔면서 면도날과 잉크는 비싸게 파는 방법, 외국인의 비자 연장을 어렵게 하는 행정 절차 등도 그런 예다. 책은 기업의 출장비 정산도 일종의 슬러지라고 말한다. 왕복 400달러지만 환불이 안 되는 항공권과 1200달러지만 전액 환불되는 항공권 중에서 출장자는 1200달러 표를 선택한다. 회의 참석이 취소됐을 때 회사가 이미 지급한 경비를 정산해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휴대폰 요금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다른 회사와 비교하기 어렵게 하거나, 계약서나 식품 포장 용기에 감추고 싶은 내용을 작은 글씨로 써넣은 것도 슬러지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저자들은 스마트 공개를 강조한다. 모든 식품 성분 목록을 한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식이다. 주거래은행 앱에서 모든 금융회사 계좌를 관리할 수 있는 오픈뱅킹도 그런 방법 중 하나다.
‘넛지는 속임수다.’ 《넛지》 출간 후 제기된 비판 중 하나다. 사람들 모르게 행동을 조작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란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선한 넛지’와 슬러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한 넛지는 공개적이며 투명하다는 것이다. 무더운 야외 행사에서 ‘물을 조금 더 마셔요’라는 안내 메시지를 전광판에 띄우는 건 정직한 방법이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메시지를 중간중간 몰래 끼워 넣어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 저자들은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인간의 순수한 선택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제품에 어떤 식으로든 설계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책에는 어느 식으로든 선택 설계가 필요하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