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조선시대 한강 나루터 주막집은 돈 몰리는 '금융 플랫폼' 이었다

입력 2022-06-24 17:58
수정 2022-06-25 00:14
조선시대에도 ‘큰돈’을 만진 사람들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근대적 화폐경제가 열리기 시작한 조선의 부자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역사 커뮤니케이터 장수찬은 《조선의 머니로드》를 통해 그간 묻혀 있었던 조선 경제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돈이 만들어낸 세상을 이해하려면 돈이 탄생한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돈이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흐를 때 경제 발전의 기회가 생기고, 그 기회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하는 사람이 부를 거머쥐었다. 저자는 화폐경제를 무대로 ‘돈깨나 벌었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물교환이 기본이었던 조선의 실물경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급격하게 변화한다. 명나라 원군과 함께 유입된 은화를 기반으로 중국 상인과의 교류 등을 통해 화폐경제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17세기부터는 동아시아 삼각무역을 통해 일본의 은이 대량 유입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근대적 경제활동이 조선에서 이뤄진다. 유교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은 상업을 사농공상 가운데 가장 아래에 뒀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계층과 분야에서 돈의 흐름을 포착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한강 나루 주막집은 지금의 금융 플랫폼 역할을 했다. 한강 포구, 팔도의 물산이 모여드는 곳에 자리 잡은 주막집들은 서울에 물건을 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곳을 장악한 ‘객주’는 도매업, 물류업, 대부업 등 각종 사업에 장소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플랫폼 기능으로 큰돈을 벌었다. 주막집에 형성된 새로운 금융 생태계는 조선의 근대적 경제 발전에 탄탄한 자양분이 됐다. 개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개성상인은 조선에서 누구보다도 금융 시스템을 잘 이해한 집단이었다. 조선은 ‘화폐 가뭄’이 고질적인 문제였다. 개성상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환과 어음이라는 신용제도를 만들고, 지금의 무담보 대출과 비슷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했다.

조선시대 금융 서비스는 신용거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계를 조직해 모은 투자금을 여러 산업에 투자하는 일종의 사모펀드도 있었다. 그중 인삼 산업은 오늘날의 반도체처럼 부가가치가 큰 사업이었다. 수익률이 원가의 15배에 달할 정도였다. 개성상인은 조합을 중심으로 운용하는 막대한 유동자금을 바탕으로 인삼산업을 거대 산업으로 육성했다. 나아가 국제무역에 용이하도록 유통기한을 늘린 홍삼도 개발했다. 이들이 국제무역 등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와 자금은 근대화와 국방 개혁에도 보탬이 됐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