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를 지낸 70대 A씨는 유일한 재산인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후배와 제자들을 위해 모교이자 전 직장인 학교에 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겨질 부인의 거주 문제가 고민이었다. 이에 A씨는 배우자가 사망한 뒤 해당 아파트를 기부하도록 하는 내용의 ‘기부신탁’을 한 시중은행과 체결했다.
A씨처럼 유산 기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은행들이 최근 신상품을 출시하고 제휴처를 확대하는 등 기부신탁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이를 통해 기업 이미지 제고와 주거래 고객 유치 효과를 동시에 누리겠다는 전략이다. ○유산기부 문화 확산기부신탁이란 위탁자가 금전이나 부동산 채권 유가증권 등의 자산을 은행에 맡긴 뒤 생전에 운용 수익을 받다가 사후에 남은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미리 설정해 놓은 곳으로 기부하는 것을 말한다. 유언장과 같은 효력을 지니면서 입체적인 기부와 금융 솔루션 컨설팅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기부를 통해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면서 기부신탁 수요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1인 가구 증가로 상속할 곳이 마땅치 않아 기부를 택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남편과는 사별했고 자녀는 모두 해외에 살고 있는 B씨는 기부신탁을 통해 생전에 필요한 병원비를 신탁계좌에서 꺼내쓰도록 하고, 남은 재산은 종합병원에 기부하도록 약정했다.
기부신탁을 이용하는 고객층도 다양해지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누구나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70~80대뿐 아니라 50~60대의 기부신탁 상담도 늘고 있다”고 했다.
2010년 금융권 처음으로 유언대용신탁인 ‘하나 리빙 트러스트’를 출시한 하나은행이 기부신탁에도 가장 적극적이라는 평가다. 작년 연세대에 이어 올해 고려대, 서울대 발전기금, 이화여대, 강남세브란스병원과 기부문화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제휴사가 직원 및 동문 등 잠재 기부자를 상대로 유산기부 장려를 하면 하나은행은 법률 세무 부동산 등의 전문가를 붙여 기부신탁 상품을 추천하거나 설계해주는 방식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기부신탁’ 봇물다른 은행들도 작년 하반기부터 기부신탁에 공을 들이고 있다. 국민은행은 작년 9월 ‘KB위대한유산 기부신탁’ 상품을 내놓은 데 이어 11월 동국대와 제휴협약을 맺었다. 2017년 연금 형태로 노후관리를 받으면서 기부할 수 있는 ‘우리나눔신탁’을 선보인 우리은행은 작년 11월 ‘우리내리사랑 신탁서비스’를 선보이며 기부신탁 서비스 라인업을 확대했다. 우리은행은 지난달 삼육대와 신탁을 통한 기부 활성화 협약을 맺었다.
신한은행에는 ‘신한 Life care 기부신탁’과 ‘신한 S-Life care 유언대용신탁’ 등의 상품이 있다. Life care 기부신탁의 경우 10만원부터 소액으로도 가입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신한은행의 제휴기관으로는 숙명여대 동국대 한양대 건국대 등이 있다. 작년 10월 고승범 당시 금융위원장이 “은행이 종합재산관리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탁업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하는 등 당국이 신탁업 진흥정책을 시사한 것도 은행들이 앞다퉈 기부신탁에 뛰어들고 있는 이유로 꼽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부자의 뜻을 기리고자 수수료를 최소화하고 있다”며 “기부신탁 고객을 예금 등 다른 분야 중장기 고객으로 유치하거나 은행의 사회적 이미지를 높이는 등 부수적 효과가 더 크다”고 했다. 앞으로도 은행들이 기부신탁을 포함한 신탁 비즈니스를 강화할 것이란 예상이 많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