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해 7월 공공기관의 과도한 사내대출 관행을 시정하라는 지침을 내렸지만 1년이 지나도록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민간 대기업보다 많은 복리후생을 당연시하는 ‘공기업 문화’와 개혁에 반발하는 공공기관 노조의 합작품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주환 국민의힘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공공기관 중 사내대출 제도를 운용하는 26곳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3곳만 정부 지침에 맞게 관련 규정을 바꿨다. 8곳은 일부 규정만 개정하는 데 그쳤고 강원랜드, KOTRA,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한국광해광업공단 등 15곳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7월 공공기관이 예산이나 사내근로복지기금을 통해 주택자금을 직원에게 융자할 때 대출금리를 한국은행의 ‘은행가계대출금리’ 이상으로 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담보인정비율(LTV) 규제를 적용하고 무주택자가 85㎡ 이하의 주택을 구입할 때만 대출해줘야 한다는 내용도 지침에 담았다. 대출 한도는 주택구입자금 7000만원, 생활안정자금 2000만원으로 제한했다. 그러면서 사내대출 지침 적용 여부를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일부 공공기관이 연 0~1%대 초저금리로, 많게는 1억원 이상을 직원들에게 대출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칼’을 댄 것이다. 당시 정부 규제로 주택담보대출을 받기 어려운 가운데 일부 공공기관 직원이 과도한 복리후생을 누리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지나친 사내대출 혜택을 없애라는 정부 지시는 1년이 다 되도록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다. 공공기관 노조의 반대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사내대출은 단체협약 사안이라 노조가 끝까지 버티면 바꿀 수 없다”며 “기관장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경영평가에 지침 변경 여부를 반영하겠다고 했는데도 노조의 ‘버티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한국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협의회는 당시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등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이 의원이 조사한 공공기관 중 사내대출 규정을 지침대로 바꾸지 못한 23곳 모두 그 이유로 “노조와 협의가 마무리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공공기관은 사내대출을 무기한 중단하고 있다. 노조의 반대에 밀려 사내대출 규정을 바꾸지는 못하고, 기관 경영평가에 불이익을 받는 것을 피하고 싶다 보니 선택한 ‘꼼수’다. 일각에선 공공기관 사내대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면 슬그머니 대출을 재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공공기관의 과도한 복리후생 논란은 사내대출뿐 아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와 그 자회사는 각각 직원 1인당 연평균 401만8000원과 400만원의 복리후생비를 지급해 논란이 됐다. 공사와 자회사들은 복리후생비 일부를 예산에서 지급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은 1인당 평균 300만원 이상의 사내 복지 혜택을 누렸다. 성과급도 ‘나눠먹기식’일 때가 적지 않다. 건강보험공단, 한국철도공사(코레일) 등 일부 공공기관 노조는 직원들의 성과급을 다 모아 다시 일괄 분배하기도 했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과거에도 노조 반대로 공공기관 개혁 시도가 무산된 사례가 많다”며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원칙대로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다시 개혁이 무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병욱/곽용희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