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곡물 80% 수입하는 韓, 식량위기 남 일 아냐"

입력 2022-06-17 17:51
수정 2022-06-17 23:44

‘식량 위기.’ 요즘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 중 하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탓이다. 올 들어 국제 밀 가격은 60%, 옥수수 가격은 30% 넘게 올랐다. 곡물 소비량의 80%가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구조적으로 식량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식량위기 대한민국》이란 책을 낸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그는 요즘 한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농업 전문가다.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농업진흥청 농업과학연구원, 농업기술실용화재단, 한국국제협력단(KOICA) 라오스 사무소 등을 거쳐 2018년 자신의 연구소를 세웠다.

남 소장은 “식량 위기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라며 “곡물시장의 불안정성은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원인은 기후 변화다. 그는 “이미 작년부터 미국과 브라질에 큰 가뭄이 들면서 콩과 옥수수 가격이 치솟은 상태”라며 “올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지면서 어려움이 가중됐다”고 설명했다.

농사에서 풍년과 흉년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 캐나다 호주 브라질 아르헨티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주요 곡창지대에서 동시에 흉작이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동안 세계 곡물시장이 안정을 유지한 비결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가뭄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러시아의 가뭄으로 촉발된 글로벌 식량 위기가 대표적이다. 2013년까지 여파가 이어지며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아랍의 봄’(중동에서의 민주화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남 소장은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섭씨 1.1도 높아지면서 기후 변화 영향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 1.5도까지 상승할 텐데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난해 발표한 6차 보고서에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적용하더라도, 늦어도 2040년에는 최대 1.5도 올라갈 것”이라고 결론 냈다. 3년 전 예측보다 10년 앞당겨졌다. 2100년께에는 상승 폭이 2도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지구 기온이 오르면서 새로운 경작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호주와 남미에서 가뭄이 심해지는 대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의 생산량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전쟁이 변수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는 낙후한 인프라가 문제다. 내륙에서 생산된 곡물을 항구로 옮기고 전 세계로 실어 나르는 데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호주와 남미를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남 소장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는 2~3년 갈 것”이라며 “그사이에 북미·남미·호주에 동시에 가뭄이 오는 ‘퍼펙트 스톰’이 발생하면 사상 최악의 식량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처럼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식량 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식품 가격이 오를 뿐 밥을 굶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량 위기는 가장 취약한 곳부터 공략해 궁극적으로 모든 곳에 영향을 준다. 처음에는 가난한 나라, 저소득 계층에 타격을 주지만 임계점을 넘어가면 선진국에도 파국적인 영향을 미치곤 한다. 최근 세계 각국이 ‘식량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격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47%, 곡물 자급률은 20% 수준이다. 자급률을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 소장은 “현재 국내 농민들의 평균 연령은 68세”라며 “현 자급률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해외에서 문제가 터지면 한국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해외 식량 공급망을 탄탄하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수입 지역을 다각화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해외 상황을 미리 예견하는 시스템을 갖춰 식량 부족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시간도 벌어야 한다.

한국의 농업 기술로 개발도상국의 생산량을 늘리는 것도 식량 문제 해결에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는 “한국은 적극적인 연구개발(R&D)로 농업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나라”라며 “이를 활용해 개도국의 농업 생산량을 늘려주면 그 혜택이 우리에게도 돌아온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