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악몽'

입력 2022-06-16 17:21
수정 2022-06-17 00:23
인구 650만 명인 중남미 소국 엘살바도르에는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다. 국민의 70%가 은행 계좌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국내총생산(GDP)의 20%를 해외 교민 송금에 의존할 정도다. 극심한 재정난에도 ‘퍼주기’로 권력을 잡아온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을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자국 화폐를 포기했다. 지난해 9월엔 암호화폐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했다.

당시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은 “비트코인을 사용하면 송금 수수료(10%)를 아낄 수 있는 데다 경제도 활성화할 수 있다”며 전 국민에게 1인당 30달러어치씩 코인을 지급하고 추가 매수를 독려했다. 올해는 “비트코인 가격이 개당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까지 오를 것”이라며 추격 매수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비트코인 가격이 연일 폭락하면서 국가 부도 위기에 내몰리고 말았다. 지난해 11월 6만9000달러까지 올랐던 비트코인은 최근 2만1000달러대로 추락했다. 엘살바도르 정부가 1억500만달러(약 1360억원)를 들여 산 비트코인 가치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내년 1월에 갚아야 할 국채만 8억달러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S&P글로벌레이팅스는 채무 상환 능력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며 국가신용등급을 ‘CCC+’로 강등했다. 대통령 말만 믿고 비트코인을 따라 산 국민들도 파산 위기에 놓였다. 온 나라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책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연쇄 부도 상황에 몰린 것이다.

암호화폐는 한때 ‘디지털 시대의 금’으로 불렸다. 하지만 가격 안정성과 신뢰성이 무너지면서 맥없이 추락하고 있다. 미국 기업 마이크로스트래티지와 테슬라도 비트코인에 물려 각각 10억달러, 5억8000만달러의 손실을 봤다. 비트코인 값이 1만달러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테라·루나의 폭락에 암호화폐 금융회사 셀시우스의 인출 중단 사태까지 겹치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코인 투자’에 뛰어든 직장인과 주부 등이 600만 명에 육박하니 엘살바도르 전체 인구와 맞먹는 규모다. 스페인어로 ‘구세주(엘살바도르)’를 뜻하는 지구 반대편 나라의 악몽을 보면서 ‘코인 버블’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이들의 고민도 함께 깊어지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