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파월·이창용 풋, 진퇴양난 세계경제의 현주소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2-06-13 10:21
수정 2022-06-13 10:47

1998년 월가에서 거대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파산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등이 설립한 LTCM은 파산 직전까지 압도적인 고수익으로 글로벌 투자업계를 뒤흔든 주역이었다. 파생금융상품 가격결정이론인 ‘블랙 앤드 숄즈’ 모델을 실전에 적용해 투자의 신세계를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모라토리엄'이라는 블랙스완이 닥치자 보유 중이던 러시아 채권은 휴지조각이 됐고, 1조5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부실이 발생했다.

금융공황 우려에 시장이 패닉에 빠졌을 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당시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그는 과감하게 세달 연속 기준 금리를 인하했고, 돈의 힘으로 시장을 극적으로 안정시켰다. 금융사들에도 과감한 구제금융을 주선하며 빠르게 사태를 진압했다. 그렇게 ‘최종 대부자’의 존재감이 확인되자 ‘그린스펀 풋’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가격이 폭락해도 좋은 가격에 팔 수 있는 권리인 ‘풋 옵션’처럼 자산시장 위기 시 그린스펀이 언제나 바닥을 든든하게 받쳐줄 것이란 신뢰였다.

그린스펀 풋은 '버냉키 풋'으로 이어졌다. 2006년 초 취임한 버냉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양적완화(QE)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시장을 구원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증시가 40% 넘게 폭락하자 정책금리를 0%까지 내리고, 아낌없이 돈을 풀어 큰 반등장을 만들어냈다.

미국 중앙은행의 이런 행보는 '페드 풋'이라는 일반명사를 탄생시켰다. 위기 시 중앙은행이 등장해 투자자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신조어다. 버냉키의 후임 재닛 옐런 의장 시대에도 이어진 페드 풋은 전 세계 투자자들의 '비빌 언덕'이자 최후 보루로 간주돼 왔다.

현 Fed 의장 제롬 파월도 첫 임기 4년 동안 적절하게 '파월 풋'을 행사했다. 특히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경기둔화를 막기 위한 완화정책을 충실히 수행해 '슈퍼 비둘기'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첫 임기 중 미국 증시는 2배가량 급등했다.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올해 초부터 상황은 급반전했다. 주가가 급락하는데도 파월은 페드 풋 발동은커녕 가파른 통화긴축이라는 정반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40년 만에 전 세계를 강타한 인플레이션 탓에 불가피한 금리인상의 외통수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S&P 500과 나스닥은 고점 대비 20~30% 폭락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페드 풋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은 살아 있었다.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달 말 "9월에는 금리 인상을 쉬어가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발표된 5월 소비자물가(CPI)가 찬물을 끼얹었다. 물가상승률이 예상(8.2%)을 뛰어넘는 8.6%로 나오자 '긴축 공포'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시장에선 6월 FOMC의 '자이언트 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설까지 등장했다. 당초 6, 7월에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밟은 뒤 11월 중간선거 목전인 9월 FOMC에는 금리인상이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인플레이션 정점이 지났다"는 관측에 따른 기대였다.

하지만 이제 6, 7월 중 자이언트 스텝이 결행되고, 9월 금리인상도 불가피할 것이란 두려움이 가득하다. 지금까지 페드 풋이 가능했던 배경은 낮은 인플레이션율이었다. 40년 만의 기록적인 물가상승률이 페드 풋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든 모습이다. 미국뿐만 아니다. OECD국의 4월 물가도 9.2%로 치솟았다. 여기에다 세계 3대 곡창지대가 쑥대밭이 되며 푸드플레이션(푸드+인플레이션) 조짐이 만만찮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미국과 아르헨티나는 동태평양 이상 저온현상인 라니냐로 극심한 가뭄에 시달린 탓이다.

한국에서도 '이창용 풋'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는 전임 이주열 총재에 비해 매파적 스탠스가 뚜렷하다. 지난 주말 한국은행 창립 72주년 기념사에서 "글로벌 물가상승 압력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중앙은행 본연의 역할이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며 공격적인 금리정책을 시사했다. 지난달 26일 금융통화위원회 뒤에는 "물가 상승의 부정적 파급효과가 더 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성장보다 인플레 진압에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어쩌다 중앙은행장들의 입만 바라보게 된 처량한 신세의 글로벌 자산시장은 진퇴양난에 처한 글로벌 경제의 거울이다. 세계 각국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단순히 자산시장의 미래에 대한 이슈만은 아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후해 온 달러와 중앙집권적 통화시스템의 평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백광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