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래 최악 침체' 실리콘밸리의 새 슬로건…"살아남으라" [설리의 글로벌 픽]

입력 2022-06-10 11:00
수정 2022-08-19 09:12
"상황이 예전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델마와 루이스처럼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력 벤처투자 회사인 벤치마크 캐피털의 빌 걸리 총괄파트너는 최근 트윗을 통해 이렇게 경고했다.

지난 20년간 미국 실리콘밸리를 지배했던 정신은 "빠르게 혁신하라(Move fast and break things)"였다. 이제 그 슬로건이 바뀌었다고 9일(현지시간) CNN방송이 보도했다. 새로운 슬로건은 "비용을 줄이고 살아남으라(Cut costs and try to survive)".

40년 만에 찾아온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미국 중앙은행(Fed)의 고강도 긴축 정책은 최근 실리콘밸리를 강타했다. 올해 들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의 IT 섹터 주가는 19% 하락했다.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도 20% 넘게 빠졌다.

테크 업계에선 최근 감원과 채용 동결 소식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올들어 주가가 크게 하락한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플랫폼은 신규 채용을 동결하거나 축소하기로 했다. 차량호출 서비스 업체 우버도 비용을 삭감하고 신규 채용을 줄이겠다고 했다. 무료 주식거래 앱 로빈후드는 정규직 직원의 약 9%를 감원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다. 빅테크 기술주 가운데서도 그나마 평가가 괜찮은 마이크로소프트(MS)도 오피스와 윈도 부문 부사장이 신규 채용시 먼저 경영진으로부터 승인을 받으라고 당부했다.


월가에서는 고성장 기술주가 더 이상 증시를 이끌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늘고 있다. 저금리 시대의 최대 수혜자였던 대형 기술주를 버리고, 코로나 팬데믹에서 경기가 회복되면서 강세가 예상되는 저평가된 가치주에 눈을 돌리라고 투자자들에게 조언한다.

최근 수 주간 벤처캐피털업계에서도 잇단 경고가 나오고 있다. 벤처캐피털 업체 라이트스피드는 최근 "지난 10년의 호황은 분명히 끝났다"고 블로그에 올렸다. 테크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액셀러레이터 Y 콤비네이터는 "경제가 얼마나 나빠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상황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최악에 대비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투자업체 르네상스 캐피털의 수석 기업공개(IPO) 시장 전략가인 맷 케네디는 시장의 기류가 '상전벽해(major sea change)'라고 진단했다. 케네디는 "수년간 스타트업들은 대체로 똑같은 각본대로 움직였다. 손실을 얼마나 보든 상관없이 가능한 한 빨리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게 투자자들이 원하는 바였다. 자금 조달비용이 쌌기 때문에 손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수익이 중요해졌다. 투자자들은 이익을 좀더 면밀히 주시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속성장하는 많은 테크 스타트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다. 당분간 해고가 이어지고, 일부는 파산하고 인수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CNN은 "아무도 현재 시장의 하강 국면이 얼마나 오래 갈지 얼마나 심각할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시장 연구자들이 2000년 닷컴버블 붕괴 때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런 경고들이 고공행진하던 테크 업계에 뚜렷한 반전의 계기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선 현 상황이 닷컴버블 붕괴 때보다는 훨씬 낫다는 분석도 나온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댄 왕 부교수는 "대형 테크 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여전히 재무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게다가 테크 플랫폼들이 제공하는 많은 서비스는 소비자들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점들이 닷컴버블 시기와 현재를 비교하거나, 향후 몇 달간 벌어질 일을 예측하기 어렵게 한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테크 기업들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이런 조정 과정은 일부 시장의 거품을 제거함으로써 이로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결국 기술이 미래다"라고 강조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