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전 대통령 한마디에 사저 앞 집회 저지…기업은 공권력 방관 속 '시위 지옥'

입력 2022-06-05 17:29
수정 2022-06-13 15:07
“대기업 본사 주변은 정말 ‘헬(지옥)’입니다. 대헬요.”

직장인 이모씨(40)는 매일 오전 7시면 창문을 뚫고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이씨가 사는 곳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300m 떨어진 오피스텔. 여러 시위대가 몰려들어 소음이 뒤엉킬 때면 정말 고통스럽다. 주요 대기업 인근에선 이런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이씨는 “경찰에 신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며 “앞으로 절대 대기업 본사 근처에는 집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소음에 둘러싸인 대기업 주요 대기업 본사 앞 ‘소음 시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기업 본사 앞 소음도는 수시로 80dB을 넘는다. 100dB 가까이 올라가는 날도 있다. 80dB은 지하철이 지나가는 수준의 소음이고, 100dB은 헬리콥터 바로 옆에 있는 수준의 소음이다.

지난주 평일 5일간 삼성전자 서초사옥 정문 앞 소음을 측정한 결과 최저 66dB, 최고론 88dB까지 치솟았다. 시위대가 틀어 놓은 노동가, 장송곡 등이 울려 퍼질 때마다 소음 측정기 숫자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삼성전자 사옥과 맞닿아 있는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인근도 상황은 비슷했다. 확성기 소리가 커질 때면 80dB은 기본이었다. 가장 소음이 심각할 때는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 사이. 점심시간대 직장인 이동이 많을 때를 겨냥해 시위 강도를 높인 탓이다. 삼성전자 한 직원은 “얼마 전 임신한 직장 동료는 오전 11시 반이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장송곡 소리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예정보다 일찍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주거지역, 학교, 종합병원 인근은 최고 소음도가 주간(오전 7시부터 해지기 전)에는 85dB, 야간(해진 뒤부터 0시 전)엔 80dB, 심야(0시부터 오전 7시)에는 75dB을 넘으면 안 된다. 대기업 관계자는 “시위대는 대부분 이 같은 기준을 아슬하게 피해가며 ‘소음 공해’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반 포기’ 상태다. 경찰은 폭력, 방화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는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헌법에 명기된 국민의 권리라는 이유에서다.

이미 시시비비가 가려진 사안이거나 이해당사자가 아닌 경우에도 시위부터 하고 보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임금 인상, 퇴직자 복직, 보험비 추가 지급 등을 요구하는 일도 많다. 스피커와 확성기로 오너 기업인의 이름을 부르며 고함을 치곤 한다. ‘OOO! 개XX’ 같은 욕설을 내뱉는 사례도 흔하다. 사내 어린이집까지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자녀들이 공포를 호소해 등원시키지 않는 직장인도 있다. 피해는 직원·주민 떠안아 이 같은 소음 시위는 직원들뿐 아니라 인근 거주자, 주변 상인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 서울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인근 주민은 소음 시위를 중단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여러 차례 강남구 등에 제출하기도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회와 시위는 헌법상 국민의 권리지만, 다른 가치와 상충할 만큼 과도하면 제대로 제재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은 집회·시위 관련 규제 강도가 매우 약하다”고 했다. 특히 집회·시위 소음 관련 규제 수준은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낮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미국 주거지역 내 소음은 낮엔 60dB, 야간에는 55dB 이하를 지켜야 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직 대통령이든 기업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불법 집회·시위에 대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시위 피해와 관련,페이스북을 통해 “국회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약하지 않되, 주민 피해를 최소화할 입법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3일 경남 양산경찰서는 코로나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가 집회를 신고한 13곳 중 문 전 대통령 사저 앞과 평산마을회관 앞에 대해 집회 금지를 통고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 이후 집회 만능주의가 확산했다”며 “무슨 일이든 시위로 해결하려는 관행이 깨질 수 있도록 불법 집회·시위를 엄단할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지은/구민기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