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가 선배 시인을 씁니다 [책X책]

입력 2022-06-04 06:00
수정 2022-06-04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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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겠다는/미친 제자와 앉아/커피를 마신다/제일 값싼/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시인의 시 '프란츠 카프카' 중 일부다. 시인은 잔인하게도 이 시 앞머리에 샤를르 보들레르, 위르겐 하버마스 등 이름난 예술가와 철학자 이름을 나열한 뒤 각 800~1200원의 가격을 매겼다. 메뉴판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는 '쓸모 없어서 가치 있는' 문학에 바치는 슬픈 사랑고백이다.

시인은 떠났지만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들은 남아서 그의 시를 다시 읽는다. 올해 오규원 시인 15주기를 맞아 오규원문학회는 그를 기리는 평론집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를 발간했다.

오규원 시인은 '시인들의 시인'이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쓴 <현대시작법>은 한국 시인들의 교과서다. 그는 한 가지 색깔로 둘레를 치고 가운데 네모 안에는 시인 캐리커처를 담는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특유의 표지 디자인을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라는 시를 쓴 일화로도 유명하다.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의 필자는 박동억 문학평론가 등 비평가·연구자 12명. 발간사는 "이 책은 오규원 시인의 문학을 다시 읽으려는 문학인들의 노력과 열정의 결실"이라며 "새로운 세대가 오규원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오규원 문학의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 "기억한다는 것은 기념비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감각으로 만들고 미래를 향해 개방하는 일"이라며 "오규원을 읽는 일은 창조적인 사유와 상상력의 영역이라는 것을 이 책은 입증한다"고 덧붙였다. "오규원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풍부하고 정밀한 텍스트이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이었고 내년 사망 55주기를 맞는 시인 김수영을 새로 읽으려는 시도도 거듭된다.

고봉준 문학평론가 외 23인은 최근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를 펴냈다. 부제는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가족, 유교, 한국전쟁, 설움, 전통, 자유, 혁명, 여혐 등 다양한 관점에서 김수영과 그의 시를 다시 읽어낸다.

김수영의 시를 후배 문인들이 되새기는 건 인간 김수영 혹은 그의 시가 완전무결해서가 아니다. "김수영의 꽃은 미완이고 못난 데도 있다. 꽃보다 꽃을 지지하는 산문의 줄기가 더 요란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시사는 김수영의 꽃을 완성품으로 숭배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기입된 비뚤어진 글자를 다시 세우고 다시 비틀면서 그가 하고자 했으나 완수하지 못한 것, 그 문제 설정의 용기와 정직한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이 김수영의 꽃이 시들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이다."(오연경 문학평론가)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