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지난 26일 나이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가 위법이란 판결을 내놓으면서 산업현장이 들썩이고 있다. 정년을 늘리지 않으면서 임금만 삭감한 임금피크제에 대한 판결이었지만 대법원이 임금피크제 전반에 관해 합법성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요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2014년부터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해온 정부가 일관성 있게 정책을 집행했더라면 호봉제 임금체계에 따른 임금피크제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혼란의 출발점에는 전략 부재에 정권교체 때마다 정책을 뒤집으며 허송세월한 정부가 있다. 정부는 2014년 3월 ‘합리적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 2015년 2월 ‘임금체계 개편 사례집’을 내놓고 2015년 9월엔 기업의 임금체계 개편을 명시한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대타협 직후 불요불급한 ‘저성과자 해고’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면서 노동계는 대타협 파기를 선언했고, 임금체계 개편은 물 건너갔다. 이후 정부는 2016년 8월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가이드북’을 내놓기도 했으나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노사의 불신 속에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이후에도 정부는 ‘임금체계 개편의 마중물’로 삼겠다며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를 도입했으나 2017년 친노동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없던 일이 돼 버렸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임금체계 개편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공공부문 호봉제를 직무급제로 개편하겠다는 정책 의지는 노동계가 정색을 하자 유야무야됐다. 지난 10년 가까이 정부가 임금체계 개편에 공을 들였더라면 이번 대법원 판결과 같은 혼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대법원이나 입법부도 이 같은 혼란을 조장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법원은 전자부품연구원(현 한국전자기술연구원)에서 일했던 연구원이 정년은 61세로 유지하면서 55세 이상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취업규칙은 ‘고령자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며 깎인 임금 지급을 요구한 소송에서 근로자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이번 사건을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사건’이라고 하면서도, 고령자고용법상 임금에 차이를 둘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에 대한 기준(제도도입 목적의 타당성, 불이익 정도, 업무량 감축 등 조치, 감액된 재원의 적절한 사용)을 제시했고, 이 기준이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외에도 ‘하급심에서 진행 중인 사건 관련 개별기업의 임금피크제의 효력 인정여부’를 가를 것이라고도 했다. 대법원 판결이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것이다.
법원에서는 관련 판결이 엇갈리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달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13년 직원 정년을 60세로 늘리면서 도입한 임금피크제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 반면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9월 주식회사 대교의 임금피크제가 정년연장을 전제로 했지만, 적용 연령대가 낮고 임금 삭감 폭도 과도하다는 취지로 무효라고 판단했다.
논란의 밑바닥엔 국회의 엉터리 입법도 있었다. 국회는 2013년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고령자고용촉진법을 통과시키면서 상응조치인 임금체계 개편에 대해서는 ‘사업장 여건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결국 허술한 국회 입법과 모호한 사법부의 판단, 행정부의 안이한 자세가 임금피크제 관련 산업현장의 혼란을 부추겼다. 국회는 임금피크제 취지에 맞게 관련 법을 개정하고, 사법부는 향후 판결에서 대법원이 제기한 네 가지 요건이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에도 적용되는지 여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행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는 네 가지 요건을 구체화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현장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 고용노동부는 대법원 판결 다음날 “관련 판례 분석, 전문가 및 노사 의견 수렴을 거쳐 현장에 혼선이 없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는데, 빈말에 그쳐선 안 된다.
또 공공부문부터 호봉제 대신 직무급제 등을 도입하는 임금체계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 윤석열 정부도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확산을 국정과제로 내걸었다. 이 약속을 지키는 게 임금피크제 혼선을 줄이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