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어제 판결했다. 단순히 나이만으로 근로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한 고령자고용법(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어겼다는 해석이다. 임금피크제가 사실상 무력화되고 임금 소송 대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져 산업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대법원은 퇴직자 A씨가 자신이 일했던 연구기관을 상대로 낸 임금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A씨의 업무가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임금이 지나치게 많이 삭감됐고 업무량 감축도 없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해당 연구기관은 정년 60세 의무화 이전부터 정년이 61세였는데, 다른 기업들과 달리 정년을 늘리지 않은 채 만 55세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연령차별 금지 법 조항을 어겼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노사가 합의했더라도 임금피크제가 유효하려면 임금 삭감 폭과 기간, 업무량 및 강도의 저감, 감액 재원 사용의 적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 판결이 개별 기업에 관한 것이고, 대법원이 임금피크제를 전면 부정하지 않은 만큼 정년 연장 조건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대법원이 임금피크제의 효력이 유지되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을 새로 설정했다는 게 문제다. 대법원의 기준 제시에 따라 노사 간 임금피크제 재논의 협상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임금 소송이 줄을 잇는 등 심각한 노사 갈등이 우려된다. 당장 임금피크제의 적정성과 대상 근로자의 임금 삭감 수준 및 업무량을 놓고 노사 대립이 심해질 게 불보듯 뻔하다.
더욱이 임금피크제로 아낀 금액이 제도 도입 목적(청년 고용 등)에 사용됐는지 따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은 납득하기 힘들다. 고령자고용촉진법이 개정돼 2016년부터 정년 60세 이상을 의무화하면서 노사에 임금체계 개편에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했는데, 이번 판결은 이런 법 개정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통상임금에 이어 또다시 노사가 합의한 사항을 법원이 뒤집어 노사 자치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되풀이된 점도 유감스럽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늘어나 신규 채용이 위축되고 기존 근로자의 고용도 불안해지는 등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개별 사업장에서 기존 임금피크제 내용과 적정성 등을 둘러싸고 극심한 혼선이 빚어질 가능성도 크다. 한국노총은 “임금피크제 폐지 및 무효화 투쟁을 독려하겠다”고 선언했다. 해고자의 노조 가입이 허용된 탓에 이들이 임금 소송 투쟁의 선봉에 설 가능성도 점쳐진다. 산업현장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고용노동부가 서둘러 대법원 판결 취지에 맞춰 행정해석을 내리고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이 7만6000여 곳에 달하는 만큼 통상임금 사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폭탄이 산업현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