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더 이상의 정부 실패는 없어야

입력 2022-05-25 17:32
수정 2022-05-26 00:17
“지금 우리나라는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 끝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지만, 국내 경제의 현실과 특성을 압축적으로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는 발전 초기부터 무역 개방을 통해 성장했고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금융 개방은 우리 경제가 완성도 높은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장 원리에 반하는 경제 운용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엄중한 경고와 그에 수반되는 경제적 손실에 대한 우려가 시장경제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울타리 역할을 한 것이다. 국내 경제와 국제 경제를 분리하기 어려워 국제 금융시장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매우 피곤한 경제지만, 긴장감을 유지한 덕분에 풍요와 번영을 이룩했고 주요 10개국(G10)의 위상에 걸맞은 명실상부한 ‘개방된 시장경제’로 변모했다.

안타깝게도 지난 5년은 정부의 일탈로 우리 경제가 역주행한 시간이었다. 정부의 규제 권력이 시장을 완력으로 밀어냈고, 시장은 제대로 작동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학계의 우려와 산업현장의 간절한 호소도 규제 권력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그로 인한 수많은 정부 실패를 분식하거나 심지어는 시장 실패로 호도하면서 규제 권력의 폭주가 지속됐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성장, 고용, 분배, 재정건전성 중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을 정도다. 개방된 시장경제의 작동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정부 실패의 대가를 온 국민이 톡톡히 치르고 있다. 경제 회복을 위한 윤석열 정부의 첫걸음도 개방된 시장경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믿음을 재건하고 정부 실패를 최소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유념할 것이 있다.

첫째, 고도화된 개방경제의 경우 정부 실패의 경제·사회적 비용이 막대하고 때로는 외환위기와 같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실제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대부분 국가는 정부 실패의 대표 격인 재정 파탄이 위기 원인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지난 5년간 누적된 정부 실패를 정상화함으로써 얻는 경제·사회적 이익 역시 막대하다는 것이다. 정상화가 빠를수록 좋은 이유다.

둘째, 정부 실패를 정상화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이 규제개혁과 노동개혁이다. 현재 정치 지형상 가장 어려운 개혁 과제지만 가장 기대효과가 크고 시급한 개혁이다. 자본과 기술은 국제 이동이 자유화된 생산요소인 반면 규제와 노동은 국제 이동이 제한적인 생산요소다. 규제의 질과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은 그 자체로 생산성 증가와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동시에, 해외 자본과 기술을 국내로 유인하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한다. 추세적으로 하락하는 잠재성장률을 회복하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역할이다.

셋째, 글로벌 유동성 파티가 끝나고 통화긴축과 스태그플레이션의 반격이 시작된 지금이야말로 국제 금융시장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한 시점이다. 위기의 순간에 국제 금융시장이 우리를 다른 신흥시장국과 차별화하도록 유도하는 소통이어야 한다. 소통의 실패는 곧 정부 실패다. 세계 역사상 지금처럼 높은 부채 비율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이라는 이중의 악재 속에서 고강도 통화긴축을 시작한 전례를 찾기 힘들다. 세계 경제와 국제 금융시장 모두 전인미답의 길에 이미 들어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완전 개방된 우리 경제를 외환위기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외환보유액이 아니라 투자자들의 신뢰다. 특히, 정책당국이 시장의 가격 기능을 존중하는 시장친화적 정책 대응을 통해 대외 충격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 전 정부와 한국은행이 국내외 경제 상황에 대한 점검과 선제적인 위험관리 방안을 협의한 것은 환영할 일이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제 금융시장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 실증적 증거로 무장한 메시지와 이를 절제된 언어로 전달할 세련된 메신저가 필요하다. 전문성과 국제 경험을 두루 갖춘 신임 경제부총리와 한은총재에 대한 기대가 크다. 더 이상의 정부 실패는 없다는 확신을 국내외에 심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