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후 2시 서울 한남동 갤러리 타데우스로팍. 도자기들이 매달려 있는 전시장 중앙에 두 여성이 입을 맞춘 채 서 있다. 두 여성 사이에 스탠딩 마이크가 자리잡는다. 정적이 흐르자 사람들은 공기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소리에 집중한다. 3분 뒤 이들은 맞닿은 입술을 떼고 자리를 떠난다.
‘입을 위한 작곡’이란 이름의 이 퍼포먼스는 영국 현대미술가 올리버 비어(37·사진)의 국내 첫 개인전 ‘공명-두 개의 음’에 나온 작품 중 하나다. 다음달 11일까지 매주 토요일 같은 시간에 열린다. 두 인체를 하나의 악기로 결합한 게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어의 작품은 ‘공명 회화’로 불린다. 두 개의 음이 만들어내는 공명,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공명, 전시장과 관람객이 만들어내는 공명 모두 작품이 된다. 갤러리에 걸린 도자기 입구엔 마이크가 설치돼 있어 사람들이 걸어다니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파장을 들을 수 있다.
벽에 걸린 푸른색 회화 작품들은 손으로 그린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소리가 그린 그림’이다. 그는 “공기는 음파를 만들고, 음파는 또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며 “두 개의 음이 만나 화성을 이루는 음악처럼 공기의 기하학적 흐름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비어는 10여 년 전부터 공명을 연구했다. 드럼 위에 소리의 파동으로 움직이는 밀가루 입자가 그 시작이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작업하던 2015년 동료의 도자기 컬렉션을 구경하다 우연히 도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오묘한 소리에 집중했다. 그는 이 소리를 채집했다. 캔버스 위에 파란색 안료 가루를 뿌리고 캔버스 아래 대형 스피커를 설치해 소리를 증폭시키자 가루들은 춤을 췄다.
그는 붓 없이 소리로만 그림을 그린다. 마치 뮤지컬 퍼포먼스를 연상케 하는 화성을 찾아냈다. 그 결과 깃털이나 바람, 구름이 만들어내는 물결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비어는 “스피커가 공기를 움직이고, 공기가 캔버스 위 안료를 움직이면서 느슨하게 올려진 안료들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하나의 형태를 완성해나갔다”고 했다.
공명 회화는 이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며 완성된다. 공기 속 기하학적 진동이 그림을 그린다. 불협화음이 있을 땐 지루하고 특징 없는 문양이 나오고, 알맞은 소리가 어우러지면 눈부신 결과물이 나왔다.
작가의 회화 작품명은 모두 ‘공명 회화’라고 쓰여 있지만, 그 옆엔 시적 부제가 붙어 있다. ‘사랑이 내리다’ ‘흐름’ ‘나는 멸시받는 아내라오’ ‘첫눈에 반한 사랑’ 등이다. 공기와 소리가 만들어낸 추상들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비어는 영국 현대음악아카데미에서 음악 작곡을 공부한 뒤 옥스퍼드대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다. 파리 소르본대에선 영화 이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다양한 예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각, 설치 작품, 영상, 몰입형 퍼포먼스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든다. 뉴욕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루이비통재단, 팔레드도쿄 등에서 전시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