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현 정부에서 ‘잘나가는’ 경제 전문가 명단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또 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76)가 세운 한국금융연구센터 출신이자 정 전 총리의 은사인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94)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순학파’ 계보로 분류된다는 것. 조 교수와 정 전 총리가 키운 인재들이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셈이다.
정 전 총리와 조 교수는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한국 경제학계를 이끌었다. 정책 입안에도 적극 참여했다. 조 교수는 경제부총리와 서울시장 등을, 정 전 총리는 국무총리와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러는 내내 스승은 제자를 끌었고, 제자는 스승을 따랐다. 《나의 스승, 나의 인생》은 정 전 총리가 조 교수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과 공직 경험 등을 회고한 책이다.
책은 정 전 총리가 서울대 경제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7년에서 시작한다. 조 교수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한 해다. 1학년 경제원론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아 공부에 흥미를 잃었던 정 전 총리는 조 교수의 경제학 강독 수업을 듣고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대학 졸업 후 한국은행에 취직한 그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한 것도, 컬럼비아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그를 서울대로 부른 사람도, 그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던 장인·장모를 설득한 것도 조 교수였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 시절에도 조 교수는 최고의 멘토였다.
책에는 서울대 총장 시절 서울대를 없애고 싶어 했던 노무현 대통령과의 갈등,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비화 등 흥미로운 회고도 여럿 담았다. 경제학 고전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 ‘야성적 충동’의 번역에 관한 대목이 특히 재미있다. “어느 날 선생이 ‘animal spirit’를 번역해 보라고 하셨다. 내가 대뜸 ‘동물적 근성’이라고 대답하자 선생은 ‘학자가 동물적 근성이 뭔가? 야성적 충동으로 하게’라고 하셨다. 그렇게 번역어가 정해졌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