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수속의 99.25%에 인감을 찍는 절차를 폐지하겠다. 관공서가 팩스로 접수하는 대신 이메일로 정보를 모으도록 하겠다.”
2020년 9~10월 고노 다로 당시 일본 행정개혁상의 ‘탈인감·탈팩스’ 선언이다. 일본 지방자치단체와 보건소가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팩스와 수작업 등 후진적인 방식으로 집계한다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게 계기였다. 하지만 탈인감·탈팩스 선언 2년이 다 되도록 일본은 여전히 코로나19 현황 파악을 팩스에 의존하고 있다. 없어지지 않는 ‘팩스 집계’요미우리신문이 43개 주요 지자체를 대상으로 코로나19 제5차 유행(작년 8월)과 제6차 유행(지난 2월 말) 당시 환자 발생 신고서 제출 상황을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팩스로 제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와 하마마쓰시는 신고서의 약 95%를 팩스로 접수했다.
일본 정부는 2020년 5월 감염자 정보를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해 ‘허시스(HER-SYS)’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허시스 이전에도 일본은 전염병 발생 상황을 집계하는 ‘네시드(NESID)’라는 시스템이 있었다. 네시드는 병원으로부터 팩스로 받은 자료를 보건소 직원들이 입력하는 시스템이었다. 팩스 집계를 없애도록 의료진이 직접 감염자 정보를 입력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허시스다.
하지만 시스템 도입 2년이 지나도록 주요 도시의 병원 절반 이상이 여전히 팩스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병원이 감염자 정보를 팩스로 보내면 보건소 직원들은 허시스에 수작업으로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밀려드는 팩스를 감당하지 못한 오사카시는 3억4000만엔을 들여 민간에 허시스 입력을 위탁했다. 나고야시는 팩스 자료를 입력하는 전담팀을 꾸리는 데 올해 1억4400만엔을 쓴다. 현장 의료진은 “허시스의 입력 방법이 복잡해 손으로 쓰는 것보다 시간이 2배 이상 걸린다”고 하소연한다. ‘칸막이 행정’이 비효율 불러후생노동성은 1995년 한신대지진을 계기로 병원의 의료물자 부족을 파악할 수 있는 ‘광역재해구급의료정보시스템(EMIS)’을 구축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하자 ‘G-MIS’라는 시스템을 새로 만들었다. 기존의 EMIS에는 코로나19로 부족한 마스크와 방호복을 입력하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관리와 관련해서는 후생노동성이 2021년 2월 ‘백신접종원활화시스템(V-SYS)’을 개발한 뒤 두 달 지난 2021년 4월 내각관방이 ‘백신접종기록시스템(VRS)’을 따로 개발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존 시스템을 보완하거나 통합하는 대신 정부 부처가 각각의 시스템을 매번 새로 개발하는 이유는 칸막이 행정 때문이다. 사카시타 데쓰야 일본 정보경제사회추진협회 상무는 마이니치신문에 “각 부처가 제각각 정보기술(IT) 업체에 발주하다 보니 시스템을 보완하기보다 새 시스템을 만드는 편이 빠르고 싸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의 디지털 체계는 “기존 시스템에 새 시스템이 덕지덕지 추가된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같아졌다”고 사카시타 상무는 지적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