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해외 출장과 오랜 비행 탓에 옷이 구겨져 난감해하던 남편에게 아내가 말했다. “화장실에 뜨거운 물을 틀고 수증기가 꽉 찬 상태에서 옷을 걸어두면 구김이 펴져요. 다리미 없이도 구겨진 옷을 펼 수 있어요. 한번 해봐요.”
그는 어느 날 다리미가 없는 호텔방에서 직접 해봤다. 옷이 수분을 흡수했다 마르면서 주름이 펴지는 원리로 결과는 대성공. 조성진 전 LG전자 부회장 부부의 이야기다. 이 부부의 사소한 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의류 가전의 시대를 열어줬다. 아내의 ‘생활의 지혜’는 9년의 연구개발(R&D)을 거쳐 LG 스타일러라는 이름으로 2011년 세상에 나왔다. 530개 특허기술 집약된 세계 최초의 의류관리기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기업이 내놓으면 고유 상품명이 그 제품을 대표하는 일반 명사처럼 굳어지곤 한다. 트렌치코트를 대표하는 ‘버버리코트’, 스테이플러를 일컫는 ‘호치키스’ 등이 대표적이다. 스타일러도 마찬가지다. 의류관리기는 세상에 없던 제품이다. 이때까지 의류와 관련 있는 가전은 세탁기와 다리미뿐이었다. LG전자가 2011년 출시한 LG 스타일러는 세계 최초의 의류관리기다.
스타일러는 내부에 수증기를 채워 옷감을 펴는 동시에 살균하고, 저온 건조로 수분을 빼내 다림질한 것과 비슷한 상태로 만든다. 면과 같은 옷감은 셀룰로스라는 분자로 이뤄져 있다. 흡수율 좋은 수증기가 침투했다가 증발하면 셀룰로스 배열이 고정되면서 옷감의 주름이 펴지는 원리다. 스타일러는 ‘옷의 스타일을 살려준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 제품은 옷걸이를 흔들어 옷의 먼지를 털어내고, 스팀으로 세균과 냄새를 없애준다. 저온 제습 방식으로 건조해 옷감도 관리해준다. LG전자 특허기술 530여 개가 집약됐다. 세탁기의 스팀 기술과 냉장고의 온도관리 기술, 에어컨의 기류 제어 기술 등 주요 가전 핵심 기술을 쏟아부었다. 삼겹살·담배 냄새 옷에 배게 하고 제거하는 과정 반복스타일러는 출시하자마자 ‘대박’이 났다. ‘어떻게 하면 옷을 세탁소에 덜 맡길 수 있을까’란 고민을 덜어주는 신개념 가전으로 입소문이 났다. 대부분 정장을 입고 출근하고, 저녁엔 고기를 구워 먹는 회식이 많은 한국 문화에 딱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냄새가 배고 양복이 구겨진다고 매번 세탁소에 맡길 순 없는 노릇. “드라이클리닝 비용을 생각하면 스타일러 한 대 사자”는 흐름이 생겨났다. 개발에 참여한 김동원 LG전자 연구위원은 “실험실에서 담배, 삼겹살, 고등어구이 냄새 등을 옷에 배게 하고 제거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연구했다”며 “탈취에 구김을 펴는 기능까지 넣기 위해 개발한 기술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LG전자가 스타일러로 낸 글로벌 특허는 220여 개에 달한다. 핵심 기술은 스팀이다. 물을 100도까지 끓여서 만드는 트루스팀은 탈취와 살균에 효과적이다. 트루스팀은 외출 때 사용한 마스크에 묻은 바이러스도 99.99% 이상 제거한다.
기술 개발은 출시 이후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올해는 스팀을 만드는 히터를 1개에서 2개로 늘린 듀얼 트루스팀을 적용한 신제품을 내놨다. 소비전력이 다른 두 개의 히터를 다양하게 조합해 옷의 재질에 따라 스팀을 미세하게 조절해준다. 캐시미어, 실크 관리 코스도 추가했다. 작동 시간도 꾸준히 줄여왔다. 살균은 99분에서 79분, 표준 관리는 39분에서 35분으로 줄었다.
옷걸이를 흔드는 ‘무빙행어’ 기술도 진화를 거듭했다. 옷을 1분에 200회 털어 미세먼지를 없애고 생활 구김을 펴준다. 바지선을 잡아주는 바지 필름도 주요 특허기술 중 하나다. LG전자는 이 제품을 출시한 이후 가전업계에서 ‘퍼스트무버’ 이미지를 얻었다. 이후에도 세탁물 건조기, 직수 정수기, 뷰티 관리기 등 새로운 형태의 가전제품을 내놨다. 작년 2월 누적 생산량 100만대…하루에 274대씩 팔려LG 스타일러의 국내 누적 생산량은 지난해 2월 100만 대를 넘어섰다. 하루에 274대씩 팔린 셈이다. 시장 규모도 성장세다. 국내 의류관리기 시장은 2020년 60만 대에서 지난해 65만 대로 늘었다. 올해는 7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관측된다. 시장을 만든 LG 스타일러의 점유율은 70%를 넘는다. 삼성전자 코웨이 등도 의류관리기 개발과 판매에 뛰어들었지만 ‘원조’의 존재감은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일상을 바꾼 LG 스타일러는 이제 세계인이 쓴다. 미국 러시아 영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 20여 개국에서 팔린다. 미세먼지, 알레르기에 민감한 사람들, 각종 바이러스 감염이 걱정되는 이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