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벤처캐피탈(VC) 업계의 화두는 유통 분야 플랫폼 업종을 뜻하는 이른바 컨슈머테크였다. 지난해에만 3조5000억원이 몰리면서 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히 패션 플랫폼들의 인기가 높았다. 매출 200억 이상 주요 9개 기업의 거래액이 총 7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활성화함에 따라 무신사의 경우 ‘몸값’이 코스닥시장 6위(펄어비스·3조 7349억)와 맞먹는 3조8000억원에 달했다. 흔들리는 신뢰 이랬던 분위기가 올해 들어 180도 바뀌었다.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주요국들의 ‘빅스텝’ 금리인상으로 인해 자본시장이 급격히 냉각하면서 VC 업계에선 “몇몇 패션 플랫폼 기업들의 경우 전주(錢主)를 찾아 백방으로 뛰는데, 투자하겠다는 곳이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본시장 위축이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너나 할 것 없이 과도한 출혈을 불사하며 ‘몸집’을 불리는 성장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투자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발표된 주요 기업들의 지난해 감사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매출 200억원이 넘는 9개 패션 플랫폼은 지난해 영업손실은 총 2050억원으로 전년(851억원)보다 2.4배 불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주요 패션 플랫폼 중 무신사(영업이익 541억원)와 W컨셉(30억원)을 제외하고 전부 영업손실을 냈다.
적자 기업들 모두 연중 할인정책과 유명 연예인들을 활용한 TV 광고 등으로 영업선전비가 급증한 게 핵심 요인이다. 줄줄이 200억~300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명품 플랫폼이 특히 그렇다.
발란은 김혜수, 머스트잇은 주지훈, 트렌비는 김희애 등 수억 원의 몸값을 지급해야 하는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했다. TV와 옥외 전광판에는 명품 광고로 도배되면서 트렌비와 발란의 경우 작년 광고비 지출 상위 50위 이내에 들기도 했다.
트렌비는 지난해 광고선전비로 298억원, 발란과 머스트잇은 각각 191억원과 134억원을 지출했다. 전년 대비 3~7배 늘어난 금액이다. 발란 관계자는 “인지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광고비용이 늘었다”며 “다만 광고비를 제외하면 판매비·관리비 중 다른 내역들은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1년 내내 할인 쿠폰을 뿌려 대는 ‘연중 세일’ 방식의 마케팅도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브랜디의 경우 지난해 영업손실(594억원)이 전년(197억원)보다 3배 급증하자 쿠폰 발행을 축소하기도 했다. 정보기술(IT) 개발자의 몸값이 높아지고, 배상물량이 늘어나면서 임금과 지급수수료 지출이 급증하는 것은 다른 e커머스 기업들이 겪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어려움이다.
보수적으로 변한 투자자들 VC 업계는 패션 플랫폼들이 ’성적’으로 자신들의 몸값을 입증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 투자유치나 기업공개(IPO)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시장 급랭으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VC 업계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맬 태세인데, 패션 플랫폼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시장정보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올 1분기 미국 내 벤처캐피탈 투자 규모는 작년 4분기에 비해 2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대표도 비전펀드가 33조원의 투자손실을 내자 “올해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IPO가 난관에 봉착할 경우 패션 플랫폼들은 매각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라며 “투자유치에 실패한 곳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면서 시장재편이 시작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지그재그와 W컨셉이 각각 카카오스타일과 이마트에 매각된 게 ‘예고편’일 수도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