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함부로 쏜 화살, 82학번 40년

입력 2022-05-17 17:39
수정 2022-05-18 07:05
순전히 반은 의무감, 반은 허탈함으로 기록을 남긴다. 10년 전 썼던 ‘82학번이 82학번에게’, 5년 전 ‘386세대는 어쩌다 밉상이 됐을까’라는 칼럼의 속편이다. 필자를 포함해 속칭 ‘똥파리 학번’이 1982년 대학에 들어간 지 올해로 40년이 됐다. 이순(耳順)을 넘어 내년이면 환갑이다. 지난 40년이 곧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이룬다.

선후배들처럼 82학번도 5공의 엄혹한 시절 젊은 날의 고뇌, 숱한 간난고초를 겪었다. 그래도 운 좋게 고도성장의 혜택도 한껏 누렸다. 2000년대 초 정치권 물갈이 때 대거 발탁돼 20년간 초장기 집권 중이다. 벌써 4~5선(選)이 수두룩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젠 정치뿐 아니라 정부 대학 법조 기업 금융 문화 언론 등 각 분야의 요직을 꿰찼다. 인생 클라이맥스다.

그렇다 보니 82학번은 요즘 가장 뜨거운 뉴스메이커다. ‘시대의 우화(寓話)’가 된 조국, 적반하장의 뜻을 검색하게 만든 이재명, 모두까기의 달인 진중권이 다 82학번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김민석 조정식 안민석 정춘숙 김성주 이용우 강기정 김의겸 은수미 등과 국민의힘의 조해진 송언석 김상훈 박수영 나경원 이혜훈 등 전·현직 의원이 즐비하다. 문재인 정부의 백운규 성윤모 안경덕 조성욱 구윤철 등 장관급 각료들 못지않게, 윤석열 정부에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최상목 경제수석, 강석훈 전 정책특보 등이 있다. 하루라도 이들 82학번 관련 뉴스가 없는 날이 없다.

대개 1963년생 토끼띠인 82학번은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이자 586 운동권의 실질적 맏형 격이다. 58년 개띠 이후 이토록 오래 주목받고 있는 세대도 드물다. 그런 만큼 스타가 많다. 정치인은 물론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김난도 서울대 교수도 인지도가 높다. 대법관도 셋이나 있고, 금통위원도 나왔다. 삼성 LG SK 등 주요 대기업과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도 많다.

82학번은 어디 가나 숫자가 많아서 눈에 띄었다. 고1 때(1979년) 대전 전주 마산 춘천 제주 등 도청 소재지까지 평준화된, 전국적인 ‘뺑뺑이’ 세대다. 운동권이든 아니든 심정적 동일체에 가깝다. 주체사상을 들여온 것도, NL(민족민주)파와 PD(민중민주)파의 분열이 시작된 것도 82학번이다.

하지만 양(量)이 질(質)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사회적 관심과 혜택을 누렸지만 누구나 인정할 만한 성취나 미래 비전을 보여준 게 없다. 오히려 한 꺼풀 벗겨보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알뜰히 특권과 특혜를 챙겼다는 험한 소리를 듣는다. 30~40대 논객들이 쓴 《386 세대유감》에선 ‘누가 우리 미래를 도둑질해갔나?’ 신랄하게 묻는다. 초장기 집권 불로세대, 꼰대 갑질의 기득권, 원정출산 사교육 해외유학의 기원, 부의 추월차선을 타고 부의 대물림을 추구한 것이 386세대란 것이다. 그중에서도 선봉이 82학번이다.

물론 잘나가는 양지의 82학번만 있는 건 아니다. 입학 당시 대학 진학률은 30% 남짓했다. 대학을 나왔든 안 나왔든 대다수 동년배는 명퇴·정년, 노후, 부모 건강과 자식 걱정에 주름이 늘어간다.

스무 살부터 40년은 인생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82학번의 각자 현재 위치는 ‘함부로 쏜 화살’처럼 흩어졌다. 체제 전복을 꿈꾼 이석기(전 통합진보당 의원), 왕년의 논객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과기대 교수)처럼 변함없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원조 주사파에서 북한 인권 운동가로 180도 돌아선 김영환,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던 운동권의 상징에서 횟집 사장으로 변신한 함운경도 있다. 그 간극이 메우기 힘들 만큼 극과 극이다.

조국 사태가 한창일 때 원희룡이 친구 조국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쓴소리했다. 그러자 이진경은 “희룡아, 그렇게 살지 마라”며 조국을 옹호했다. 이를 본 서울 공대 운동권 출신 김대호는 ‘이진경, 너야말로 그렇게 살지 마라’는 글에서 ‘1980년대 화석’이 연상된다고 직격했다. 복잡다단한 현실과 대화해본 적 없는 허망한 관념론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82학번이 늙어가고, 한 시대가 간다.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인 이 코호트 집단이 더 이상 쓸모가 있을까. 김부겸 김영춘 같은 선배와 달리, 퇴장할 기미도 없다. 젊은 세대가 입 모아 ‘그렇게 살지 마시라!’고 외치는 듯하다. 뭐라 답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