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민간이 10년간 3500억원을 투입해 반도체 고급 인력을 양성하는 사업의 예산이 애초 계획보다 40%가량 삭감된다. 윤석열 정부의 ‘반도체 초강대국 건설’ 공약이 구호에 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9일 정부와 업계 등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제출한 ‘민관 공동투자 반도체 고급 인력 양성사업’에 대해 애초 계획(3500억원)의 60% 수준인 2100억원으로 사업비를 축소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번주 이 같은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업은 반도체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산업부와 반도체업계·학계가 공동 추진한다. 내년부터 2033년까지 10년간 3500억원을 투입해 석·박사급 반도체 인력 3500명을 배출하는 게 핵심이다. 사업비 절반인 1750억원은 삼성전자 등 기업이 투자하고 나머지는 정부 예산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지난해까지 3년째 예비타당성 조사 문턱을 넘지 못하다 올해 대폭 삭감해 통과를 앞두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인 반도체산업에 예산을 과도하게 투입할 수 없다며 삭감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는 “이 정도 사업비로는 고급 인력을 2100명 정도밖에 양성하지 못한다”며 ‘반쪽짜리 사업’에 그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업계 인력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면 산업 경쟁력 전반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반도체 인력에 年 3812억 투자…한국은 350억도 '불통'10년간 총 3500억원 VS 1년간 3812억원.
한국과 미국이 반도체 기술 인력을 육성하는 데 투입하는 비용의 차이다. 이마저도 한국 금액은 계획상 수치다. 이달에 이 금액의 60% 수준인 2100억원으로 확정될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매번 “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실상 지원책은 ‘맹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산업부는 최근 과기부에 “‘민관공공투자 반도체 고급인력 양성 사업’ 사업비가 최소 3048억원 이상으로 통과하도록 협조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한 것을 전해졌다. 과기정통부가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해당 사업비를 당초 계획한 3500억원보다 40% 삭감한 채 통과시키기로 내정한 데 따른 긴급 대응이다.
산업부 측은 “한국 반도체업계는 고급 인력 양성이 4년이나 지연되면서 인력난이 심각해지고 있다”며 “향후 10년간 석·박사 인력 3500명은 배출해야 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반도체 분야는 기술 난도 등을 감안하면 석·박사급 연구를 통한 훈련이 필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산업부는 내년부터 2023년까지 국내 반도체업계에 최소 5565명의 석·박사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내다봤다. 시스템반도체가 2122명으로 가장 부족하고, 공정장비(1652명), 소재(1219명), 메모리반도체(572명) 등 순이다. 이 전망은 주요 기업 동향, 수요 등을 반영한 최소 수치여서, 현실적으로는 이보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는 전언이다.
○인력 투자 늘리는 미국·유럽다른 주요 글로벌 국가는 반도체 인력 양성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늘리는 추세다. 미국 정부·업계는 우수 연구인력 양성을 목표로 세운 ‘국가반도체기술센터(SRC)’에 연간 3억달러(약 3812억원)를 투입하고 있다. 기술 고도화를 감안해 기존 1억달러(1271억원)였던 연간 사업비를 최근 세 배로 늘렸다. 미국은 첨단·안보 반도체 R&D에도 5년간 125억달러(15조8813억원)를 투입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정부, 산업, 대학 공동으로 반도체 인공지능(AI) 칩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3% 이상을 반도체 연구개발(R&D)에 투입하는 계획도 세웠다. 중국은 기술 인력 양성과 반도체산업 육성 등을 위해 총 55조원 규모의 국가 반도체펀드를 운영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10년간 3500억원’도 깎으려 하는 한국의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며 “반도체 패권 및 기술 속도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업비 절반을 부담하겠다고 나섰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도 힘이 빠지는 분위기다.
○“1등 산업엔 투자 안 해” 홀대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경제 부문 공약으로 ‘반도체 초강대국’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110대 국정 과제 중 24번째로 ‘반도체·AI·배터리 등 미래전략산업 초격차 확보’를 포함했다. 반도체 수출을 지난해 기준 1280억달러(약 162조1120억원)에서 2027년 1700억달러(약 215조3050억원)로 32.8% 확대한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하지만 반도체업계와 학계는 인력 양성 사업 규모를 40%나 축소해서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동안 정부는 이미 경쟁 우위에 있는 산업에 연구개발비를 더 쏟을 수 없다는 이유로 투자도 줄였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반도체 R&D 국책 사업 예산은 한 푼도 없었다.
이번 사업비 삭감 역시 비슷한 논리가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단군 이래 한국의 특정 산업이 세계에서 압도적 1위를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최고 위치에 있다고 방치하면 점차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