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쇼스타코비치…음악에 새겨진 위대한 이름 [송태형의 현장노트]

입력 2022-05-08 20:34
수정 2022-05-08 21:51

책에는 표지에 저자의 이름이 표기돼 있고, 그림에는 어딘가 한 편에 화가의 서명이 들어 있어 창작자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음악에는 작곡가의 이름이 어떻게 새겨져 있을까요? 가사가 없는 추상적인 음악에 이름을 넣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지난 6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제43회 정기연주회 현장입니다. 본격적인 연주에 앞서 연주곡 해설을 위해 마이크를 잡은 음악평론가 송주호가 위의 질문을 화두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이날 음악회의 주제 또는 제목은 ‘음악에 새겨진 이름’, 영어로는 ‘My Name in My Music’입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를 통해 음악과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곱 번째 시간”이라고 했는데 이번에 선택한 작품이 ‘현악사중주 5번‘이다 보니 주제가 이렇게 정해졌나 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수와 똑같은 15편의 현악사중주를 남겼습니다.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현악사중주 각 곡에는 작곡가의 음악적인 변화와 함께 각 시기 소련 사회 체제의 복잡한 측면과 이에 대응하는 개인의 심경과 상황이 반영돼 있습니다.

현악사중주 5번(1952년 작곡)은 이른바 ‘즈다노프 독트린’으로 작곡가가 큰 고통을 받고 있던 시기에 쓰였습니다. 이듬해 작곡된 교향곡 10번의 선구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두 곡 모두 작곡가 내면의 모순에 찬 갈등과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비극적이고 조금은 기괴한 정서, 깊은 사색을 풍부한 이미지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공통점은 또 있는데요. 작곡가 이름의 머리글자인 D, S(E♭), C, H(B)를 적용한 음형을 주제에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현악4중주 5번에선 음의 위치를 바꿔 ‘C-D-S(E♭)-H(B)’, 다장조 기준 계이름으로 ‘도-레-뮈(낮은 반음 미)-시’의 음형이 1악장 첫 주제에 쓰입니다. 그렇게 작곡가의 심정과 자의식을 음악에 새겨넣은 것이죠.



연주 프로그램이 흥미롭습니다. 현악사중주 5번과 같이 ‘이름이 새겨진 작품’들로 1부 프로그램을 짰습니다. 바흐의 ‘푸가의 예술’ 중 ‘대위법 14번’(J. S. Bach Contrapunctus XIV from The Art of Fugue, BWV1080)과 유진선의 ‘Mi-In-Do’(화음프로젝트 Op. 124), 알반 베르크의 ‘서정 모음곡’ 중 세 악장(A. Berg Three Pieces from Lyric Suite).

송주호의 해설과 프로그램 노트에 따르면 작곡가가 특정 인물의 이름을 음이름으로 옮겨 주제를 만드는 일종의 음악적 암호 기법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Soggetto Cavato’, 즉 ‘옮겨온 주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주로 후원자의 이름을 경의의 표시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바흐는 자신의 이름 즉 ‘B(B플랫)-A-C-H(B)’를 넣었습니다. 이는 음악 작품의 지향점이 감상자가 아니라 작곡가라는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음을, 작곡가에게 악공(樂工)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란 인식이 생겨났음을 의미합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릴 만하죠. 사회의 변화가 음악에 반영된 또 하나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대에는 19인조의 현악오케스트라, 지휘자 박상연까지 딱 20명이 올랐습니다. 첫 연주곡은 바흐의 ‘푸가의 예술’ 중 ‘대위법 14번’을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더블베이스 연주자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미치노리 분야가 편곡한 버전입니다. 바흐는 ‘푸가의 예술’ 중 마지막 ‘대위법 14번’을 작곡하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 14번은 세 주제로 이뤄져 있는데 마지막 세 번째 주제가 ‘B(B플랫)-A-C-H(B)’ 음형입니다. 바장조 곡이니 계이름으로 하면 ‘파-미-솔-피(반음 높은 파)’가 됩니다. 해설자가 예고한 대로 연주는 세 번째 주제가 몇 번 반복되고 난 후 바흐가 작곡한 부분까지 미완성 상태로 마쳤습니다. 한참 연주하다가 멈춰버린 것 같았지만 관객은 이를 알아차리고 웃음과 함께 박수를 보냈습니다. 바흐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곡의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마지막 서명처럼 새겨 넣은 셈입니다. 그 대목을 이렇게 현악 앙상블로 들으니 숙연한 마음도 들고, 바흐의 위대함도 되새겨졌습니다.

이어 유진선의 ‘Mi-In-Do’가 연주됐습니다. 2013년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공모 당선작으로, 신윤복의 그림 ‘미인도’를 모티브로 작곡된 작품입니다. 작곡가는 ‘미인도’라는 제목이 ‘미(E)’와 ‘도(C)’를 포함해 음악적이라는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도(Do)의 안(In)에 미(Mi)가 있다’는 것인데 미는 도 안에 있는 배음(倍音)이자 제3음이니 음악적으로 말이 되죠. 작곡가는 이런 음악적 구성뿐만 아니라 미인도를 보고 느낀 감흥을 시와 음악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본래 현악오중주곡인데 이날은 현악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했습니다. 주로 가장 낮은 저음을 내며 리듬을 담당하는 더블베이스가 멋진 하모닉스(배음열)를 들려줬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퍼지고 다양하게 이뤄지는 화성과 색채가 인상적인 곡이었습니다.



1부 마지막 곡은 알반 베르크의 현악사중주곡인 ‘서정 모음곡’의 여섯 악장 중 2~4악장을 작곡가가 직접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버전입니다. 실연으로 들을 기회가 드문 작품인데요. 서울시향이 지난 2월말 정기연주회에서 이 버전을 연주하려다가 협연자가 바뀌면서 취소돼 아쉬웠는데 이번에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수준 높은 연주로 잘 감상했습니다. 원곡의 3악장이자 오케스트라 버전 2악장에는 작곡가의 내연 관계였던 ‘한나 폭스’를 상징하는 ‘H(B)-F’와 알반 베르크의 ‘A-B(B플랫)’이 주요 주제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1바이올린이 아주 빠르게 연주하기 때문에 이 음을 짚어내기는 힘들었습니다. 이 곡에서만큼은 작곡가가 은밀하게 새겨 넣은 암호 같은 음형이나 이 음형에 얽힌 사연을 굳이 알고 듣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미션 후 2부에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5번을 작곡가 안성민이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실내교향곡 5번이 초연됐습니다. 이날 연주회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해설자가 연주 전에 “리허설을 들어보니 원곡의 음악적 효과를 강조해서 드러냈고, 장면의 표현을 잘 살렸다”고 했는데 들어보니 과연 그랬습니다.



5번은 세 개의 악장이 쉼 없이 연주되는 곡입니다. 1악장에서는 작곡가의 이름을 음치한 음형에 C샵을 덧붙인 C-D-S(E♭)-H(B)-C샵’ 동기가 제1주제에 등장한 후 끝까지 격렬하게 활약하는데 편곡 버전에선 이런 활약상이 더욱 도드라지게 빛났습니다. 이어지는 안단테 2악장에서는 예민한 감수성의 작곡가가 겪은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표현한 듯한 음악이 더 처절하고 가슴 저리게 다가왔습니다. 마지막 3악장에선 왈츠 주제로 기운을 차리고 무언가에 저항도 해보는 듯하지만 이내 체념과 죽음을 암시한 듯한 쓸쓸함으로 조용하게 마무리됐습니다.

현악4중주 원곡 이상의 감동을 주는 편곡과 연주였습니다. 사회의 억압과 공포, 무자비한 이념의 폭압에 짓눌리고 신음했지만, 끝내 굴하지 않으면서 더없이 내밀하고 슬픈 음악으로 자신을 호소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진정성에 공감하고 감동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앙코르로 들려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은 조금은 난해하고 진지했던 공연 레퍼토리에서 비롯된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고 밝게 해줬습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창작음악과 현대음악 위주로 참신하고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선보여 왔는데요. 이날 공연도 쇼스타코비치와 ‘음악에 새겨진 이름’을 통해 음악과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기획 취지와 프로그램이 뛰어난 연주력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연주회였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