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경제신문이 단독 보도한 ‘농협생명보험 1.6조원 자본 실종 미스터리’(4월 28일자 A1, 8면)는 국내 보험산업의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농협생명은 올해 대형 보험 사고가 발생한 것도, 투자를 잘못해 손실을 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석 달 만에 1조6000억원의 자본이 증발한 것은 회계 장부에 손을 댄 게 화근이었다.
초저금리가 지속되던 2020년 9월. 농협생명은 재무제표에 35조원 규모의 보유 채권을 ‘만기보유증권’에서 ‘매도가능증권’으로 고쳐놨다. 회계 처리상 만기보유채권은 시장금리 변동과 무관하게 채권가격(취득 원가)이 만기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데 비해 매도가능채권은 현재 가치, 즉 시가(時價)로 평가한다. 금리 하락 때 채권의 시가가 올라 평가이익이 생겨 회계상 자본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당시 자본 확충이 시급했던 농협생명은 유상증자, 후순위채 발행 같은 자금 수혈 없이 ‘회계 마사지’만으로 자본을 늘릴 수 있었고, 재무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RBC) 비율을 193%에서 단숨에 314%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올 들어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작년 말 연 2.1%대였던 국고채 10년 만기 금리가 최근 연 3.3%대로 치솟았다. ‘금리 발작’이었고 ‘채권 대학살’이 벌어졌다. 채권에서 대규모 평가손이 발생해 자본이 감소했다. 농협생명은 부랴부랴 1조원 규모의 자본을 확충했지만, RBC 비율은 당국의 권고치인 150% 아래로 떨어졌다. 재분류한 채권은 3년간 재변경이 불가능해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금리 상승세가 지속되면 RBC 비율이 100%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이 경우 금융당국이 적기시정 조치를 발동하고 최악의 경우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한다. 농협생명 측은 “금리가 이렇게까지 뛸 줄 몰랐다”고 했지만, 리스크 관리 정공법을 쓰지 않고 편법을 쓰다가 금리의 덫에 걸린 것이다.
이런 편법을 쓰다가 부메랑을 맞은 곳은 농협생명만이 아니다. RBC 비율 100%가 위태로운 곳이 1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보험업계의 집단적 모럴해저드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이들은 최근 금리 발작이 불가항력적이라며 금융당국에 선처를 요구하고 있다. RBC 비율 제도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지급여력 비율인 ‘K-ICS’가 내년에 시행되는 만큼 적기시정 조치 등을 유예해달라는 것이다.
당국은 난처한 상황이다. 규정대로 하자니 대규모 적기시정 조치로 인해 시장이 큰 혼란과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보험사에 리스크 관리 실패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지만, 금리 상승이 비정상적이고 회계상 자본 감소이지 펀더멘털이 악화한 게 아니라는 점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채권을 재분류해 손쉽게 회계상 자본을 늘리는 편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사태처럼 금리가 오르면 막대한 평가손을 입을 수 있는 ‘양날의 검’이었지만 보험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2013년 당국은 이런 제도적 허점을 고치기 위해 RBC 비율 산정에 채권 평가이익을 제외하기로 했다가 보험사들의 반발에 결국 없던 일로 했다.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당국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보험사는 고금리·고보장 상품을 많이 팔면 팔수록 그에 비례해 자본을 더 많이 확충해야 한다. 계약자들이 보험금을 요청했을 때 제때 지급할 능력(지급여력)을 충분히 갖춰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역마진을 보면서 고금리 상품을 팔아 외형을 키우는 데 주력해왔고 장기적 안목에서의 리스크 관리는 뒷전이었다. 특히 금융지주나 대기업 계열 보험사 최고경영자(CEO)는 2~3년간 ‘거쳐 가는 자리’로 인식되는 게 현실이다. 농협생명은 2015년부터 모두 농협중앙회 출신이 2년씩 CEO를 맡았다. 5년, 10년 앞을 내다보며 경영할 인센티브를 찾기 어려운 구조다. 단기 성과 위주의 경영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이런 사건은 언제든지 재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