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간)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 2022’가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 힐튼호텔 행사장의 공기는 무거웠다. 사회자는 첫 공식 세션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패널들에게 “경기 침체는 불가피한 것이냐”며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경기 상황에 대한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패널들의 진단은 하나로 모아졌다. ‘경기 침체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원하는 ‘연착륙’은 쉽지 않을 것”이란 발언까지 나오자 행사장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경기침체 공포 커졌다
코로나19 팬데믹 등에도 낙관론이 지배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 행사에선 ‘경기 침체’란 공포가 행사장을 억눌렀다. 이날 각종 세션에선 끝나지 않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셧다운 정책 등이 거론되며 ‘불확실성’이란 단어가 많이 쓰였다.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대표는 현재 경기 상황에 대해 ‘10년 만의 위기’라고 평가했다. 그는 “시장 트레이더들은 10년간 볼 수 없었던 변동성을 마주하고 있다”며 “지난주 증시에서 주식과 채권이 동시에 하락한 것이 증거”라고 말했다. 보통 반대로 움직이는 주식과 채권이 함께 떨어질 정도로 시장 예측이 어렵다는 의미다.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서도 뚜렷해지고 있는 건 ‘인플레이션의 장기화’ 가능성이다. 반도체 부족에 물류대란이 겹쳐 지난해부터 꿈틀댔던 물가는 올해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국 봉쇄가 겹치면서 불이 붙었다. Fed는 빅스텝(한 번에 0.05%포인트 금리 인상)을 기정사실화하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급하게 올리면 경기가 침체될 것”이란 우려가 가시지 않는 상황이다.
이날 월가 큰손들이 밝힌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스콧 마이너드 구겐하임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역사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낮추면서 소프트랜딩(연착륙)하는 건 쉽지 않았다”며 “인플레이션을 2%포인트 낮추려면 경기 후퇴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세계적인 헤지펀드 시타델의 켄 그리핀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향후 몇 달간은 ‘엄청나게 힘든 시기’가 될 것”이라며 “만약 물가가 잡히지 않는다면 Fed는 더 강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기 침체로 몰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부 패널은 물가가 연말에 잡힌다는 가정 아래 Fed의 금리 인상 속도가 둔화될 것이란 예상도 내놨다. 칼 메이어 실버록파이낸셜 CIO는 “인플레이션이 진정되면 Fed가 비둘기파(통화 완화론자)로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10년 순풍 증시에 역풍 불 수도”주식시장과 관련해선 암울한 전망이 쏟아졌다. S&P500지수는 연초 이후 이날까지 13.4%, 나스닥은 20.8% 하락했다. 앤서니 요셀로프 데이비슨캠프너 CIO는 “10년 넘게 주식시장에 순풍이 불었다”며 “앞으로는 역풍이 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가 상승기로 꼽히는 1973년 초부터 1981년 말까지 ‘니프티피프티’(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미국 S&P500 구성종목 중 높은 주가상승률을 보였던 50개 종목) 중 90%가 손실을 기록했다는 통계를 내밀었다.
마이클 밀컨 밀컨인스티튜트 회장은 “마이크로소프트는 닷컴 버블기인 2000년 1월 18일 시가총액(5950억달러)을 회복하는 데 17년8개월29일이 걸렸다”며 “2000년대 잘나갔던 시스코의 시총은 현재 4분의 1 수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캐시 우드 아크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차별성을 갖춘’ 기술주에 대해 낙관론을 유지했다. 그는 “인공지능(AI), 바이오, 로봇, 블록체인, 에너지저장 등의 기술은 성장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며 “나스닥100 같은 지수가 아닌, 준비된 종목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품이 꺼지고 있는 건 맞지만 시장 반응이 과도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조슈아 프리드먼 캐니언파트너스 대표는 “과거가 아닌 (주가가 떨어진) 현재의 기업 가치를 기초로 판단해야 한다”며 “투자자들이 단기적인 시각으로 과민반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는 올해로 25회째를 맞은 세계적인 경제·경영 관련 행사다. ‘정크본드(고위험·고수익 채권)의 제왕’에서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밀컨 회장의 ‘밀컨 연구소’가 주최한다. 매년 월가 거물들과 미 정부 고위 공직자 등 유명인사들이 참여해 ‘미국판 다보스포럼’으로 자리 잡았다.
로스앤젤레스=황정수/뉴욕=강영연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