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투자증권이 오는 10월 증권사 최초로 펀드 수탁 시장에 뛰어든다. 사모펀드 사태 이후 망가진 ‘펀드 인프라’를 회복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25년간 은행이 독점하던 펀드 수탁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날지 주목된다. 펀드 인프라 제공하는 수탁사
펀드 수탁은 쉽게 말해 자산운용사 등 다른 금융회사를 위해 증권·채권 등의 자산을 보관·관리하는 업무다. 펀드 수탁사들은 자산운용사의 지시를 받아 자산을 취득·처분하고 기준가 검증 및 운용의 감시 역할도 맡는다. 수탁사들이 펀드 인프라를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과거 주식 위주로 공모 펀드가 흥행할 때는 수탁 업무가 어렵지 않았다. 1997년 신탁업자인 은행들이 펀드 수탁 사업에 진출한 이후 국민 신한 하나 등 주요 5개 은행은 ‘그들만의 리그’로 시장을 과점해 왔다.
2019년부터 라임, 옵티머스 등 사모펀드 사태가 터지면서 이 시장에 균열이 생겼다. 옵티머스사태 이후 판매사인 NH투자증권뿐만 아니라 수탁 은행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규제도 강화됐다. 운용사에 대한 위법·부당행위 감시 의무가 수탁사에 부여됐다. 인력 대비 업무 강도는 높아지고 책임은 더 커졌다. 수탁사들은 상품 구조가 복잡한 사모펀드 수탁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역발상 통해 수탁사업 진출
펀드 인프라가 위축되면서 신생 사모펀드 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주식형 공모펀드의 수탁보수가 2~3bp(1bp=0.01%)인데, 규모가 작은 사모펀드는 20bp를 줘도 안 한다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사진)은 ‘역발상’을 했다. 은행들이 리스크 요인이 무서워서 피하고 있지만, 복잡한 상품 구조를 상대적으로 잘 이해하는 증권사는 사모펀드 수탁 사업을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도 크다고 봤다. NH투자증권은 프라임브로커리지서비스(PBS) 부문 업계 1위다. 헤지펀드를 운용하는 데 필요한 신용공여, 증권 대차, 자문 등을 종합적으로 해 주는 서비스다. 프라임브로커리지본부에 수탁부를 신설한 배경이다.
NH투자증권 수탁부는 10월부터 본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약 100억원을 투자해 관련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우리은행 농협은행 등에서 오랜 기간 수탁 업무를 한 인력을 영입했다.
운용감시 시스템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운용사 약관에 따라 펀드 운용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하루 단위로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장외파생, 부동산 등 예탁결제원에 전자등록되지 않은 이른바 ‘비시장성 자산’도 운용 지시를 전산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사모펀드 특화 수탁사 도전NH투자증권은 주요 은행과 고객군을 철저하게 차별화할 방침이다. 임계현 프라임브로커리지본부 대표는 “상품 구조가 복잡한 사모펀드 수탁에 집중할 계획”이라며 “가상자산, 탄소배출권 등 다양한 영역으로 수탁 사업의 영토를 확장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사모펀드 순자산 규모는 517조원이다. 전문사모펀드 제도가 도입된 2011년 이후 연평균 22%씩 성장하고 있다. 2027년 기준 수탁사업으로 60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증권사의 펀드 수탁 사업 진출에 운용업계도 크게 반기고 있다. 나석진 금융투자협회 자산운용부문 대표는 “NH투자증권의 수탁업 진출이 사모펀드 인프라 회복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다른 대형 증권사도 수탁사업 진출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되면 국내 펀드 수탁사업은 중장기적으로 주식·채권 중심의 공모펀드는 주요 은행이, 상품 구조가 복잡한 사모펀드는 증권사들이 담당하는 구조로 이원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