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는 세계 골프 용품시장을 움직이는 ‘큰손 중의 큰손’이다. 타이거 우즈를 비롯해 로리 매킬로이, 브룩스 켑카 등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최강자들이 나이키 모자를 쓴다. 올 들어 마스터스 토너먼트를 포함해 4승을 쓸어담은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도 ‘나이키 맨’이다.
나이키는 이처럼 PGA 선수들에겐 돈을 펑펑 쓰지만, 세계 최강인 한국 여성 프로골퍼에겐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모자부터 신발까지 ‘풀라인’으로 후원한 선수가 박지은, 박소혜 등 딱 두 명뿐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랬던 나이키가 2년 전 열여덟 살 소녀를 새로운 후원 대상으로 뽑았고, 그 선수가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 데뷔했다. 주인공은 29일 열린 KLPGA챔피언십 2라운드에서 컷을 통과한 손예빈(20).
나이키는 왜 손예빈을 딱 한 명뿐인 한국의 후원 대상으로 선정했을까. 나이키는 후원 대상을 정할 때 네 가지를 본다. 손예빈을 발탁한 박호근 나이키 글로벌스포츠 마케팅 골프팀장은 “잠재력과 퍼포먼스(실력), 인성, 그리고 나이키에 대한 로열티를 본다”고 했다. 대회가 아닌 평일에도 나이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정도로 브랜드를 사랑하는지도 고려 대상이란 얘기다.
까다롭게 선정하는 대신 한 번 손잡으면 가능한 한 끝까지 간다. 업계에서 나이키와의 계약을 ‘의리 계약’으로 부르는 이유다. 우즈는 사실상 평생 계약을 맺었다. 그가 10여 년 전 외도로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도 나이키는 후원 계약을 끊지 않았다. 셰플러는 열네 살 때부터 나이키 후원을 받았다. 나이키는 프로 전향을 한 손예빈에게 3년 계약(2020년)을 제시했다.
‘나이키가 고른 골퍼’란 타이틀이 부담이 됐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손예빈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했고, 2019년 태극마크까지 달았지만, 프로 무대에선 고전했다. 프로로 전향한 첫해(2020년) 1부 투어 입성에 실패했고, 지난해에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지난해 11월 열린 정규투어 시드순위전부터였다. 애를 먹이던 드라이버가 잡히더니 ‘수석’ 자리를 꿰찼다. 올해 처음 입성한 1부 투어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지난주 열린 넥센 세인트나인 마스터즈 1라운드에선 공동 선두(최종 24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주 KLPGA챔피언십에서도 순항하고 있다.
나이키의 후원 선수 선정 기준인 잠재력과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시작한 셈이다. 박 팀장은 “인성도 검증된 만큼 나이키의 네 가지 선정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선수”라며 “올해 1부 투어에 오르지 못했어도 재계약했을 것”이라고 했다.
업계에선 나이키가 제시하는 장기 계약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실패했을 땐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하는 보험이 되지만, 반대로 성공했을 경우 ‘빅딜’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키가 옷에 다른 서브 후원사의 로고를 허용하지 않는 것도 선수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다. 일반 기업과 메인 계약을 하고 서브 후원사를 통해 받는 금액을 포함하면 나이키의 계약금보다 많을 수 있어서다.
손예빈의 머릿속엔 이런 복잡한 계산은 들어 있지 않다. 손예빈은 기자와 만나 “우즈 등 대스타와 같은 옷을 입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며 “또다시 후원사를 선택하라고 해도 나이키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뒤늦게 잠재력을 활짝 꽃피운 셰플러 선수를 보고 희망을 얻었다”며 “롤 모델인 미셸 위 선수처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이날 KLPGA챔피언십대회에선 김효주(27)가 중간합계 10언더파 134타 단독 선두를 달렸다.9타를 줄인 김수지(26)가 1타 차 2위로 반환점을 돌았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