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선 나도 '시간을 거스르는 자'…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만나다

입력 2022-04-28 16:38
수정 2023-04-30 13:58


마이클 잭슨과 방탄소년단(BTS)이 한 무대에 오른다고 상상해봅시다. 클래식이라면 쇼팽과 조성진의 연탄(連彈), 축구로 치면 디에고 마라도나와 손흥민이 보여주는 ‘티키타카’라도 좋습니다. 전설과 동시대 최고봉의 ‘이뤄질 수 없는 만남’이지요. 그런데 미술계에서는 이런 만남이 2년에 한 번 현실로 이뤄집니다. 서양 중세·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정수가 담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현대미술의 최신 조류를 펼치는 세계 최대 미술전 베네치아비엔날레 덕분입니다.

지난 22일 찾은 베네치아 두칼레궁전의 살라델로스크루티니오(개표실)는 이렇게 미술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공간이었습니다. 사면의 벽을 가득 메운 건 독일 표현주의 거장 안젤름 키퍼(77)의 설치 작품입니다. 불에 타고 남은 듯한 거대한 잿빛 배경에 작업복과 관, 곤돌라와 쇼핑카트 등 오브제가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천장에서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금빛 장식과 르네상스 대표 화가들의 그림이 빛났습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이 모든 게 장엄한 모습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베네치아비엔날레 기간(4월 23일~11월 27일)에 열리는 주목할 만한 전시를 지난 20일부터 24일까지 샅샅이 훑었습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비롯한 국내 미술 전문가와 주요 외신 등이 추천한 곳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올해 비엔날레를 대표할 만한 전시를 골라 소개합니다. 예술이 일렁이는 ‘물의 도시’로 떠나봅시다. 500년 된 궁전, 현대미술로 뒤덮이다두칼레궁전 앞에는 언제나 관광객들이 긴 줄을 이룹니다. 올해는 줄이 평소보다 몇 배는 길었습니다. 비엔날레 병행 전시로 안젤름 키퍼의 대형 설치작품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궁전 내부를 한참 구경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작품에 둘러싸인 공간이 나옵니다.

키퍼가 지난해부터 2년에 걸쳐 만들어낸 이 작품의 제목은 ‘이 글은 불타고 난 뒤 마침내 작은 빛을 발한다’입니다. 1577년 화재로 방이 전소된 뒤 더 화려하게 재건된 것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벽면 곳곳에 붙은 오브제들은 한때 지중해 최강국으로 군림하다가 몰락한 뒤 다시 관광과 예술의 중심지가 된 베네치아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파괴와 창조의 순환을 표현했습니다.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습니다. 세계적인 갤러리스트인 파예즈 바라캇 바라캇갤러리 회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상을 묻자 그는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 촉촉한 눈으로 말했습니다. “전쟁과 거대한 슬픔, 그리고…희망이 가슴을 친다.” 10월 29일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궁전에서 나온 뒤 바로 앞 산마르코광장 상가의 네고지오올리베티로 향하는 걸 추천합니다. 이곳에서는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72)와 루치오 폰타나(1899~1968)의 2인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곰리 특유의 각진 조각만큼이나 건물의 독특한 구조와 곳곳에 숨겨진 격자무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탈리아 출신 건축 거장인 카를로 스카르파(1906~1978)의 인테리어입니다. 전시는 11월 27일까지. ‘세계 최고 현대미술관’ 거닐어볼까
페기구겐하임미술관은 베네치아에 온 미술 애호가라면 꼭 들르는 ‘성지’입니다.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은 ‘20세기 최고의 컬렉터’로 불리는 인물이죠. 미국 대부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막대한 돈과 뛰어난 안목으로 2차 세계대전 때 걸작을 대거 사들여 보존했고, 잭슨 폴록(1912~1956)을 발굴하는 등 현대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미술관은 그가 말년에 살던 저택을 개조해 만들었습니다.

비엔날레 기간에 이곳에서는 ‘초현실주의와 마법: 마법에 걸린 현대성’이 열리고 있습니다. 비엔날레 본전시 주제 ‘꿈의 우유’의 모티브가 된 리어노라 캐링턴(1917~2011) 등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 여럿의 걸작들이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등의 그림과 함께 걸려 있습니다. 이 밖에도 파블로 피카소와 폴록 등 이름만 말하면 아는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해 ‘걸작의 밀도’만큼은 단연 세계 최고입니다. 관객이 너무 많다는 게 흠이라면 흠입니다. 전시는 9월 26일까지. 벨기에·미국·우크라이나관은 꼭 보세요

자르디니공원에서 열리는 국가관 중 가장 인기를 끈 건 벨기에관. 이곳에서는 거장 프란시스 알리스의 신작 ‘게임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시관 곳곳의 스크린에서 세계 각국 아이들의 놀이 모습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미국관도 반응이 좋습니다. 본전시 부문 황금사자상(최고 작가상)을 받은 시몬 리가 흑인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펼쳤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파블로 마코우의 설치작품 ‘고갈하는 샘, 아쿠아 알타’를 내놨습니다.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78개의 깔때기가 삼각형 모양을 이룬 작품입니다. 인간성의 고갈을 표현하는 작품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어우러져 더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본전시 및 국가관 전시는 11월 27일까지 열립니다.

베네치아=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