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터가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다. 숙종은 재위 기간 왕위 찬탈 음모와 홍수 등 천재지변에 시달리며 편치 않은 세월을 보냈다. 이를 막아내려 풍수지리설을 좇아 1104년 남경(南京·서울) 북악산 남쪽에 이궁(離宮)을 세웠는데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조선 세종은 1426년 이궁을 경복궁의 후원(後園)으로 가꿨다. 이후 이곳에 과거시험을 보는 융문당과 군사훈련을 하던 융무당 등 건물 488칸이 들어섰고,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
일제강점기부터 청와대 터는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일제는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 관저를 지었다. 북악산과 남산을 잇는 ‘용맥(龍脈·산의 정기가 흐르는 줄기)’을 잘라 기를 누르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총독 관저는 해방 뒤 미국 군정장관 관사로 사용됐다. 정부 수립 이후엔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다시 경무대로 불렀고, 윤보선 대통령은 4·19혁명 뒤 관저 지붕의 푸른빛 기와에서 이름을 따 청와대로 바꿨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낡은 관저를 헐고 새로 짓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장기 집권 음모 비판에 시작도 못했다. 민주화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청와대 본관을 신축했다. 공사 과정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8476㎡ 넓이의 웅장한 한옥식 본관이 ‘구중궁궐’의 권위주의 이미지를 풍긴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자 대선 후보들은 청와대 이전을 단골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매번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900년 금단의 땅’이 내달 10일 낮 12시부터 일반에 개방된다. 건물 내부와 경호처 등 출입통제구역은 주요 기록물과 통신시설 등을 정리한 뒤 완전 개방될 예정이다.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 관람이 시작됐지만, 장소와 인원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청와대 개방으로 국내 문화·관광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공연·전시 공간이 조성되고 인근 미술관, 경복궁 등과 연계하면 경제효과가 2000억원(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1조8000억원(한국경제연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경제 효과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윈스턴 처칠은 “사람이 건물을 짓지만, 건물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용산 대통령 시대를 열어갈 윤석열 당선인이 청와대 시절의 제왕적 대통령제 폐단을 끊어내는 계기만 만들어도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