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1일 “과거와 같이 정부가 산업정책을 짜고 모두가 밤새워 일한다고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며 “이제는 민간 주도로 보다 창의적이고 질적인 성장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통화정책 수장에 오른 이 총재가 한국 경제의 진로에 대해 쓴소리를 한 것이다. 이 총재는 이날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4년 임기를 시작했다.
이 총재는 서울 태평로 부영태평빌딩 본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경제정책의 프레임을 과감히 바꿔야 할 때가 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취임식 연단에 오른 이 총재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이라면서도 “마음이 무겁다”는 말로 입을 뗐다.
이어 “단기적으로 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미국 연방준비제도(중앙은행·Fed)의 예상보다 빠른 통화정책 정상화, 그리고 오미크론 변이 확산에 따른 중국의 경기 둔화 가능성 등이 통화정책의 어려움을 가중하고 있다”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한층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경기 회복세가 기존 전망보다는 약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성장과 물가 간 상충관계가 통화정책 운용을 더욱 제약하고 있기에 정교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정책을 펼 때”라고 덧붙였다.
15분가량 이어진 이 총재의 취임사에는 한국 경제에 대한 고언(苦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총재는 “보다 긴 안목에서 보면 지금 한국 경제는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며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코로나 위기 이후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지, 아니면 장기 저성장 국면으로 빠져들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다”고 우려했다.
민간 주도의 경제 성장을 주문한 이 총재는 “소수의 산업과 국가로 집중된 수출과 공급망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며 “그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이를 감수하고 구조개혁을 통한 자원의 재배분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이어 “과거 잘 달리던 경주마가 지쳐 예전 같지 않은데도 과거의 성공에 사로잡혀 새 말로 갈아타기를 주저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 (secular stagnation)’에 빠지는 걸 막을 방안에 대해 “통화정책만으로는 안 되며, 재정정책과 구조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다음달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에 당부하는 발언으로 해석됐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 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날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빠르게 늘고 있는 가계와 정부 부채의 연착륙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이미 우리 대표 기업들은 재빠른 대응을 통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수출경쟁력을 확보했다”며 “공공 부문도 그런지 깊이 되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이어 “국내 문제에 치우쳐 국제사회 변화의 큰 흐름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