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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거품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침체를 근근이 버티던 일본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7년 만의 최대 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낸 데 이어 올해는 42년간 이어온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막을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탄탄한 일본 경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엔화 가치는 20년 만의 최저인 달러당 129엔대까지 추락했다.
일본 재무성은 2021회계연도(2020년 4월~2021년 3월) 무역수지가 5조3748억엔(약 52조원) 적자를 기록했다고 20일 발표했다. 2014년도(6조6389억엔 적자) 후 7년 만에 가장 큰 무역적자다.
지난 3월 무역수지는 4123억엔 적자로 8개월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엔화 약세로 제조 대기업의 수출이 늘어난 것보다 국제 원자재값이 급등한 탓에 불어난 수입이 훨씬 많았다는 분석이다. 세계 1위였던 일본의 대외순자산은 2019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나쁜 엔저’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지만 일본은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엔화 가치를 올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재정 악화가 불가피해서다.
이런 사정을 아는 투자자들은 엔화를 내다 팔고 있다. 이날 오전 도쿄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값은 한때 20년 만에 가장 낮은 129엔대까지 하락했다.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만 엔화 가치는 11% 떨어졌다.
엔저에도 무역적자가 나는 상황에서 인구 감소로 내수 시장이 무너지고 있는 것 또한 문제다. 일본 총무성은 2021년 10월 1일 기준 일본 인구는 1억2550만 명으로 1년 만에 사상 최대인 64만 명 감소했다고 지난 15일 발표했다. 65세 이상 고령자 인구 비율(28.9%)은 사상 최고, 16~64세 생산연령인구 비율(59.4%)은 사상 최저였다. ◆ 엔저에도 경상적자 예상하라다 유타카 나고야상과대 교수는 “특유의 폐쇄적인 문화 때문에 기술 혁신 시기를 놓친 것도 위기의 원인”이라며 “인구 감소, 원화 약세 등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30년간 장기 침체를 겪으면서도 일본인들은 경상수지 흑자와 대외 순자산을 근거로 ‘일본 경제는 끄떡없다’고 믿었다. 해마다 20조엔(약 192조원) 안팎의 부를 해외에서 거둬들이고, 이를 통해 쌓아 올린 해외 자산이 세계 1위라는 점이 자신감의 근거였다.
하지만 엔화 가치 급락, 경상수지 적자 등으로 일본 경제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 경제의 체질이 바뀐 탓에 충격을 견디는 맷집도 예전 같지 않다는 분석이다.
2000년대 일본은 무역수지와 1차 소득수지(해외 자산으로부터 벌어들이는 배당과 이자수입)가 10조엔씩 ‘쌍끌이’ 흑자를 내면서 연간 20조엔의 경상흑자를 올렸다. 하지만 2010년 이후 무역수지 흑자가 급격히 줄었고, 적자를 낸 해도 있었다.
엔고(高)를 견디다 못한 일본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대거 이전했기 때문이다. 동일본대지진으로 경기 침체에 빠진 2012~2014년엔 무역수지가 10조엔 안팎의 적자를 내면서 경상흑자 규모도 4조엔 안팎으로 쪼그라들었다.
2016년 후반 경상흑자가 다시 20조엔 수준을 회복한 것은 1차 소득수지로 매년 20조엔 이상을 벌어들인 덕분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일본 경제는 수출 부진을 해외 자산의 이자와 배당 소득으로 만회하는 구조로 변했다.
작년 말부터는 1차 소득수지로 경상흑자를 유지하는 구조마저 흔들리고 있다. 경상흑자를 지탱하던 1차 소득수지는 변화가 없었다. 문제는 1년 새 네 배 불어난 무역적자였다. 무역적자가 1차 소득수지 수입으로 만회를 못할 수준으로 불어난 것이다. 결국 일본의 경상수지는 작년 12월 이후 2개월째 적자를 냈다. 1월 경상적자(1조1887억엔)는 역대 두 번째 규모였다.
20년 만의 최저치인 엔화 약세가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일본의 무역적자를 증폭시켰다는 분석이다. 올해 일본의 연간 경상수지가 1980년 이후 42년 만에 적자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9일 자체 분석 결과를 토대로 올해 달러당 엔화 환율이 120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10달러일 경우 일본의 경상수지가 9조8000억엔 적자일 것으로 예상했다. 아오키 다이주 UBS증권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일본이 앞으로 만성 경상적자 국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코로나 충격 회복도 늦어경상적자는 순대외자산 감소로 이어진다. 일본의 2020년 말 순대외자산은 356조9700억엔으로 30년 연속 세계 1위다. 하지만 2019년부터 순대외자산이 줄어들면서 2위 독일과의 차이가 34조엔까지 줄었다. 2021년 말 기준으로는 독일이 31년 만에 일본을 1위 자리에서 밀어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주요국 가운데 일본 경제는 코로나19 충격에서 가장 더디게 회복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9일 일본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2.4%로 전망했다. 올 1월 전망치보다 0.9%포인트 낮췄다. 미국은 3.7%, 유럽연합(EU)과 중국은 각각 2.8%와 4.4%로 모두 일본을 웃돈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이미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한 반면 일본은 2019년 3분기의 최대치(557조엔)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GDP에서 일본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4년 18%에서 2017년 이후 6%를 밑돌고 있다. 2000년까지 세계 2위였던 1인당 GDP는 2019년 25위까지 추락했다.
한때 최상위권이던 노동생산성도 선진국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떨어졌다. 2020년 일본 근로자 1인당 노동생산성은 7만8655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28위였다. 일본 제조업의 노동생산성은 2000년까지 세계 1위였지만 2019년 18위까지 밀렸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면서 임금도 3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이다. 지난 30년간 미국의 평균연봉은 2.6배, 독일과 프랑스는 2배가량 증가했다. 반면 일본은 4% 오르는 데 그쳤다. 총무성 관료 출신으로 일본 최대 이동통신사 NTT도코모 대표를 지낸 데라사키 아키라 일본 정보통신진흥회 이사장은 “1인당 GDP가 세계 25위로 떨어진 나라가 어떻게 선진국이냐”며 “현재 일본은 쇠퇴도상국이자 발전정체국”이라고 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