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다. 러시아의 빠른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완강한 저항으로 소모전 양상이 되고 있다. 침공 배경에는 유라시아주의와 서구 공포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지정학자 헬퍼드 존 맥킨더는 20세기 초 유라시아 중심축인 동유럽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 패권을 차지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1930년대 히틀러와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권력과 세계 전략의 성패를 좌우하는 땅으로 주목했다. 넓은 영토와 인구, 풍부한 식량과 에너지 자원은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 없다. 1941년 발생한 독소 전쟁은 유럽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예정된 수순이었다. 유라시아주의는 현대판 제국주의로 애국적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적 이념이다. 잃어버린 영토와 권위를 회복하려고 애쓰는 러시아에 부합하는 개념이다. 상처받은 민족의 자존심에 크게 어필한다. 대표적 유라시아론자인 레프 구밀레프는 “오직 러시아만이 유라시아의 강대국으로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구분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두 나라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독립 주권을 인정할 수 없다. 이번 전쟁을 러시아 예외주의와 영광을 위한 성전(聖戰)으로 인식한다. 신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러시아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다.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푸틴의 러시아 제국 부활을 위한 행보로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제국주의 야심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종교적이고 애국적인 육상 강국으로 자유민주적 가치를 강요하는 대서양 해양 강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옐친 집권 시절 추진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 정책이 러시아의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의 NATO 가입으로 러시아가 ‘포위된 요새’라는 위기의식이 심화됐다. 푸틴은 2007년 뮌헨안보회의에서 미국 일극(一極) 체제의 위험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러시아 안보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의 전통적 영향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서유럽에 대한 경계심도 크게 작용했다. 오랜 기간 형성된 서구 열등감이 소련 붕괴, 국가 위상 저하 등으로 적개심과 불신감으로 이어졌다. 석유, 가스, 천연자원 수출로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생활 여건이 개선됐지만 서구에 대한 불신 심리는 극복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지도층은 서방 동맹국에 포위돼 공격받고 있다는 서구 공포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서방의 러시아 제재로 러시아가 독식해 온 유럽 가스시장이 미국에 열리게 되고, 러시아산 가스를 싸게 구입하는 중국도 이득을 보게 된다. 우크라이나 동부는 노르웨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천연가스 생산지다.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역은 셰일가스가 풍부하다. 크림반도는 많은 해상 에너지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유럽과 러시아 간 에너지 거래가 상호 의존성을 높여 평화 구축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교류 강화가 러시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이 러시아 에너지 과다 의존을 초래했다. 가스의 55%, 석유의 35%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재무상 크리스티안 린드너는 러시아 에너지 과다 의존이 실수였다고 시인했다.
키이우 후퇴로 제국의 꿈은 물 건너 갔지만 자국 내에서 푸틴의 인기는 치솟고 있다. 장기집권의 피로감과 연금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지지율이 급락했지만 최근 지지율이 90% 가까이 상승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정권교체 발언이 서구 공포증과 포위 심리를 자극했다. 푸틴 집권 이후 늘어난 중산층은 애국주의, 보수주의 성향이 강하다. 러시아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러시아 엘리트층조차 비판을 삼가는 분위기다. 러시아가 초강대국의 꿈을 재현할지 반동적 지역 세력으로 전락할지 지구촌의 관심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