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공채에 기반을 둔 연공서열과 순혈주의는 지금까지 국내 대기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직문화였다. 고도 성장기엔 신속하고 일사불란한 의사결정을 앞세운 이 같은 조직문화가 국내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과거 성장 전략에 맞춰진 경직된 조직문화로는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이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경영 일선에 등장한 젊은 오너들이 순혈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기업문화 혁신에 나서는 것도 이런 위기의식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경쟁사 CEO도 적극 영입
14일 경제계에 따르면 각 기업 외부 출신 경영진의 전문 분야는 법무와 재무뿐 아니라 전략기획·마케팅·홍보·인수합병(M&A)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과거에도 외부 출신 인사를 사장 등 경영진에 선임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 법무 등 특정 전문분야에 국한됐다. 더욱이 경쟁사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하는 것은 상도의를 깨뜨리는 일종의 ‘불문율’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선임된 외부 출신 경영진의 경력은 회계사부터 해외기관 연구원, 컨설팅업체 컨설턴트 및 고위 공무원까지 다양하다. 경쟁사 CEO 등 임원 출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제계 관계자는 “젊은 오너 3·4세들이 해외 출장 등을 통해 글로벌 기업들의 문화를 보고 느낀 것을 인사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업과 경쟁할 수 있도록 그룹 체질을 바꾸기 위해선 적극적인 외부 인사 영입을 통한 순혈주의 타파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2020년부터 그룹을 이끈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과거 현대차를 대표하던 보수적인 문화를 순식간에 바꿔놨다. 대표적인 사례가 순혈주의를 깨뜨린 것이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은 삼성그룹 공채 출신이다. 삼성물산에서 근무하다가 닛산과 노무라증권 등을 거쳤다. 이노베이션 담당인 지영조 사장은 벨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맥킨지, 액센츄어 등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이후 삼성전자 전무로 영입돼 기획팀장(부사장)까지 오른 뒤 현대차로 옮겼다. 미래항공모빌리티(AAM)본부를 이끄는 신재원 사장은 미 항공우주국(NASA) 최고위직 출신이다. ○유통·식품업계도 순혈주의 깨져현대차 못지않게 순혈주의를 앞세웠던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통상 삼성전자 사장은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삼성전자 엔지니어로 입사해 경력을 쌓은 정통 ‘삼성맨’ 출신이 도맡아 왔다. 작년 말 인사에서 삼성전자 DS부문 시스템LSI 사장으로 선임된 박용인 사장은 동부하이텍 사장을 지냈다. 이원진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도 2011년까지 구글코리아 대표를 지낸 뒤 삼성전자로 옮겼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외부 인사를 적극 영입하고, 30·40대 부사장 등 젊은 임원을 전진 배치하는 것도 조직문화 개선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순혈주의’ 색채가 유독 강한 유통·식품업계도 공고했던 공채 우선주의 문화가 깨지고 있다. 새벽배송 서비스 등장과 비대면 소비 확산 등 유통산업의 패러다임 자체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내부 인재들로는 승부를 보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정기인사에서 P&G 출신으로 홈플러스 대표를 지낸 김상현 부회장을 롯데쇼핑 수장으로 영입했다. ‘비(非)롯데맨’이 대표를 맡은 건 1979년 롯데쇼핑 설립 이후 43년 만에 처음이다. 롯데백화점 대표에 신세계 출신인 정준호 대표를 앉힌 것도 유통업계에선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신세계그룹에선 강희석 이마트 사장, 송현석 신세계푸드 대표, 이길한 신세계인터내셔날 대표 등이 외부 출신 인재다. 송 대표는 오비맥주, 이 대표는 호텔신라를 거쳐 영입됐다. ○설 자리 잃은 순혈주의주요 그룹 중 LG, SK, 포스코 등은 외부 인사 출신 CEO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특히 포스코그룹에선 대우인터내셔널 출신인 주시보 포스코인터내셔널 사장이 유일하다. 이마저도 포스코그룹이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한 데 따른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문화가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정유화학과 철강 업종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도 조만간 순혈주의 타파 흐름에 합류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CEO 후보군인 부사장 등 핵심 임원에 외부 인사 출신이 대거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경민/박한신/박종관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