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경쟁자가 나오지 못할 사양의 게임기를 만드시오.”
1981년 10월 닌텐도의 당시 사장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는 개발 2부 부장 우에무라 마사유키에게 ‘TV 게임기’ 개발을 주문하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3년간 경쟁자가 나오지 못할 고사양’, ‘게임을 교환할 수 있는 카트리지 방식’, ‘저렴한 가격’ 등이었다. 주어진 개발 기한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1980년대 초 ‘아타리쇼크’로 빈사 상태에 빠진 게임업계를 구한 ‘닌텐도 패밀리 컴퓨터(패미컴)’의 시작이었다. ‘가정용 게임기’의 표준이 된 패미컴닌텐도는 오늘날 게임 명가로 불린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업계 후발주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닌텐도는 1977년 TV에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컬러 TV 게임’을 내놨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내장된 게임만 플레이할 수 있는 데다 이미 ‘아타리 2600’처럼 게임을 바꿔가며 할 수 있는 카트리지 교환형 게임기가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세를 뒤집으려면 ‘고성능’을 갖춘 새 제품이 필요했다. 요구 조건은 당시 오락실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던 아케이드 게임 ‘동키콩’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는 것. 패미컴은 한 화면에 최대 64개의 물체(스프라이트)를 동시에 표현 가능해 당시 게임기 중에서는 상당한 고성능에 속했다.
컨트롤러 디자인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패미컴의 첫 시안은 게임기에 조이스틱이 붙은 형태였다. 당시 게임기 컨트롤러들은 조이스틱, 숫자패드 등 통일된 형태 없이 중구난방을 보이고 있었다. ‘동키콩’, ‘게임&워치’의 개발자인 요코이 군페이 개발 1부 부장이 이를 십자키와 버튼을 갖춘 컨트롤러로 변경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디자인이 됐다. 패미컴의 십자키 배치는 훗날 출시한 대부분 게임기 디자인의 표준이 됐다.
빡빡한 개발 일정을 거치고 1983년 7월 패미컴은 일본에서 첫선을 보였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닌텐도가 다른 게임사들이 패미컴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을 불허해 즐길 게임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구조 역시 비공개였다. 보다 못한 허드슨, 남코 등의 게임 개발사들이 직접 패미컴을 분해하고 하드웨어 구조를 직접 밝혀가며 게임을 만든 뒤 발매 허가를 요구했다. 닌텐도가 이를 겨우 받아들이면서 1984년부터 패미컴 게임 수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듬해 북미 출시와 함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발매되면서 패미컴은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성공한 게임기가 됐다. ‘아타리쇼크’에 빠진 게임업계 구하다패미컴의 성공은 당시 아타리쇼크로 쪼그라든 글로벌 게임업계를 되살렸다. 당시 게임시장은 저품질 게임의 범람으로 소비자들의 인식이 무척 나빠진 상태였고, 그 결과 1983년 30억달러 규모에서 1985년 1억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닌텐도는 게임 품질 관리를 위해 서드파티 게임사에 연간 발매 게임 수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초창기 미국 소매상들이 게임기 진열을 반대하자 닌텐도는 석 달간 팔리지 않은 상품은 무상 반납받는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전략은 성공했고 닌텐도는 1986년 북미 지역에서만 한 해 110만 대를 팔 수 있었다. 2003년 생산을 마칠 때까지 팔린 패미컴은 6300만 대, 패미컴을 통해 출시된 게임 수는 1060여 종에 달한다.
패미컴의 성공은 다른 게임회사들도 시장에 뛰어들게 했다. 세가와 허드슨은 패미컴에 맞서기 위해 각각 메가드라이브, PC엔진을 출시하며 맞불을 놨다. 닌텐도도 이에 응수해 1990년 슈퍼패미컴을 내놨다. 회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게임업계는 아타리쇼크를 벗어나 1990년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더욱 높은 성능을 가진 후속 기기들이 잇달아 나오면서 서서히 시장에서 밀려났지만, 패미컴은 고전게임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인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6년 닌텐도가 내놓은 ‘패미컴 미니어처 복각판’은 출시하자마자 매진 사태가 이어졌고, 세계적으로 200만 대 이상 판매되기도 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