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사 시험은 죽었다.’
지난 1월 세무사 시험을 주관하는 한국산업인력공단 앞에 전달된 근조화환에 적힌 문구다. 지난해 9월 치러진 제58회 세무사 자격시험 응시생들이 부정 출제·채점 의혹을 제기하며 집단 항의의 표시로 보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해 세무사 2차 시험 중 세법학 1부 과목에서 일반 응시생 3962명 가운데 82.1%(3254명)가 ‘40점 미만’을 받아 과락(科落)으로 탈락했다. 최근 5년간 이 과목의 평균 과락률(38%)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번 자격시험에 응시한 세무공무원 출신 728명 중 482명은 세법학 1부 시험을 아예 치르지 않았다. 현행 세무사법에 따르면 ‘20년 이상 세무공무원으로 일했거나, 세무공무원 10년 이상에 5급 이상 재직 경력이 5년 이상’이면 이 과목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불신의 골 깊은 국가자격시험그 결과 최종 합격자 706명 가운데 세무공무원 출신이 151명(21.4%)이나 나왔다. 이전 3년간 평균 비율(2.8%)보다 여덟 배 많은 규모다. 공무원들이 면제받는 과목에서 과락자가 많이 나오도록 난도를 과도하게 높였거나 서술형 문제의 채점 기준을 까다롭게 적용했을 것이란 의혹이 쏟아졌다. 고용노동부는 자체 감사에 착수했고 3개월이 흐른 지난 4일 “출제위원들이 단독으로 시험 난이도를 조절할 수 없다”며 관련 의혹을 일축했다. 다만 일부 서술형 문항의 재채점을 산업인력공단에 권고했다.
고용부 감사 결과에 응시생들은 ‘제 편 감싸기’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번 사태 이면에는 국가전문자격시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공무원에게 각종 시험면제 특혜를 주는 전문 자격시험은 세무사 외에도 변리사 법무사 관세사 공인회계사 공인노무사 행정사 등이 있다. ‘공정 세대’로까지 불리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응시생들이 이런 관습적 제도에 분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단지 공무원 경력을 쌓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반인과 경쟁하는 자격시험에서 특혜를 받는 건 이들이 생각하는 공정한 게임룰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시대착오적 공무원 특혜 없애야공무원 시험면제 특혜는 1970년대 산업화 시대 전문 인력 부족을 감안해 실무 행정 경험자들을 전문 직종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일종의 인재 양성 전략이었다. 일정 기준 이상의 경력만 있으면 관련 분야 전문 자격증을 시험 없이 자동으로 부여하던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법 개정이 차례차례 이뤄지면서 현재와 같은 시험면제 특혜만 남게 됐다. 하지만 단순한 행정업무 처리 경험만으로 특정 자격시험의 과목 일부를 면제해줄 경우 애초 이 제도의 취지와 달리 전문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자격증을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올 것이란 비판이 많다.
마침 차기 정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개선 의지를 밝힌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공정사회 실현 공약 중 하나로 ‘국가자격시험 특례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내걸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공정 잣대를 들이대야 할 국가자격시험에서 공정성이 결여되면 사회 신뢰의 균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말뿐인 공정은 대국민 사기극이나 다름없다. 공정으로 포장된 정치 레토릭은 분노의 부메랑이 돼 돌아오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0)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요행수가 통하지 않는 세상. MZ세대가 원하는 공정의 원칙은 이처럼 짧고 간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