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공짜 점심값 5200달러

입력 2022-04-04 17:07
수정 2022-04-05 00:17
“워싱턴DC에 집을 알아봤는데, 시장이 미쳤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크리스토퍼 월러 이사가 지난달 24일 ‘달아오른 부동산 시장’이라는 주제로 연설하던 중 “결국 사지 못했다”며 한 말이다. 물가를 잡아야 할 책무를 지닌 Fed의 고위 인사마저 인플레이션에 놀라고 있다는 얘기다.

체감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놀랄 정도다. 지난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7.9% 오른 것으로 집계됐지만, 이건 통계일 뿐이다. 미국에 사는 데 필수적인 주택 월세와 자동차, 기름, 음식료 등은 20~40%씩 올랐다. 블룸버그는 미국의 평균 가계가 작년과 똑같이 소비할 경우 올해 5200달러(월 433달러)씩 더 내야 한다고 추정했다.

물론 소득도 높아졌다. 2월 개인소비지출(PCE) 통계를 보면 시간당 임금은 1년 전보다 5.6% 상승했다. 하지만 물가(7.9%)를 고려하면 실질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인플레이션이 일종의 세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물가세(inflation tax)라고 부른다. 미국인 덮친 물가세 고지서인플레이션은 어디서 생겼을까. 먼저 공급망 혼란이 원인으로 꼽힌다.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일하지 못하자 생산부터 물류까지 다 막혔다. 그래서 상품 공급이 줄어 가격이 치솟았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막대한 재정 부양책도 원인으로 지적한다. 정부가 돈을 뿌려 팬데믹 속에서도 소비가 급증한 탓이란 얘기다. 실제 미국의 소매 판매는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4조8500억달러)에도 2019년보다 많았고, 작년(5조1500억달러)엔 대폭 늘었다. 사실 화물 적체 주범으로 꼽힌 로스앤젤레스(LA) 항만의 컨테이너 처리량은 작년 1080만 개로 팬데믹 이전인 2019년 968만 개보다 많았다. 상품 공급이 줄었다기보다 소비가 급증한 게 혼란을 부추긴 셈이다.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팬데믹이 없었다면, 그리고 팬데믹이 있었더라도 엄청난 부양책이 없었다면 인플레이션을 겪지 않았을 것”(하버드 가제트, 2022년 2월)이라고 말했다. 그는 “팬데믹으로 미국인들의 소득이 한 달에 500억달러 감소하자 정부는 한 달에 1500억~2000억달러를 뿌렸다. 그것이 과잉 수요로 이어져 물가가 7%까지 치솟았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미 연방정부는 지난 2년간 국내총생산(GDP)의 25%에 달하는 6조달러의 부양책을 집행했다. 그리고 Fed는 미 국채 등을 4조달러어치 이상 사들여 이를 지원했다. 경기 부양책 부메랑 맞는 국민물가세는 역진성을 띤다. 주거비와 휘발유, 음식료 물가가 뛰자 소득에서 이런 데 쓰는 돈의 비중이 큰 저소득층이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은 ‘공짜 돈’ 범람 속에 폭등한 부동산, 주식도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Fed는 물가를 잡겠다며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5월부터는 2000년 이후 처음 50bp(1bp=0.01%포인트)씩 올릴 것이란 예상이다. 금리가 뛰면 저금리 속에 빚을 낸 수많은 미국인의 부담은 커질 것이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돈을 찍으면 인플레이션은 따라온다는 뜻이다. ‘국민을 위해 돈을 찍는다’고 밝혀온 아르헨티나는 대표적 인플레이션 국가다. 이 나라의 물가상승률은 2019년 53%, 2020년 42%였고 지난해 50.9%를 기록했다. 국민들이 그만큼 물가세를 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리드먼이 말했듯 “공짜 점심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