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분기(1~3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세가 32년 만에 최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원유 밀 니켈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영향이다. 우크라이나 남쪽의 흑해 항로를 거쳐 세계로 수출되던 원자재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극심한 가격 변동이 발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대표적 원자재 가격 지수인 ‘S&P GSCI’는 올해 1분기에 29% 올랐다. 이는 1990년 이후 분기 기준으로 최대 상승률이다. 크리스 버튼 크레디트스위스자산운용 글로벌 상품 및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원자재 수급 상황이 여유롭지 못하다”며 “다양한 공급 충격이 더해지면서 원자재 가격이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도미노처럼 오르는 물가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는 이날 배럴당 100.28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올해 1분기에만 가격이 33% 급등했다. WTI는 3월 초 배럴당 123.70달러까지 올라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휘발유 가격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라 소비자들의 생활물가 부담이 커졌다.
에너지 가격 급등세는 다른 원자재 가격까지 밀어 올렸다. 밀 가격은 올해 들어 31% 상승해 2010년 이후 최고가를 찍었다. 같은 기간 옥수수 가격은 26% 올랐으며, 알루미늄 구리 니켈 팔라듐 등은 최고가를 경신했다.
유럽연합(EU)에서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 국가인 유로존의 물가도 에너지 가격 상승세에 영향을 받았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유로존의 지난 3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7.5% 상승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97년 이후 최고치로 에너지 가격이 특히 크게 뛰었다. 에너지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4.7% 올랐을 것으로 관측됐다.
이번 원자재 가격의 ‘고공행진’은 지난해 관측된 반등세의 연장선에 있다고 WSJ는 해석했다. 지난해 세계 경제는 코로나19가 촉발한 경기 침체에서 차츰 벗어나며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쪼그라들었던 수요가 되살아난 가운데 물류 대란과 기상 악화로 공급 차질이 빚어지면서 원자재 가격이 반등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변수원자재 시장에는 빠른 속도로 투자금이 몰리고 있다. 금융정보 제공업체 리피니티브리퍼에 따르면 원자재에 투자하는 뮤추얼펀드 및 상장지수펀드(ETF)에는 12주째 자금이 순유입되고 있다. 원자재 현물 가격이 선물 가격보다 높은 현상인 ‘백워데이션’이 뚜렷하다는 점도 주목받고 있다. 이는 당장 시장에 필요한 원자재 공급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당분간 원자재 공급이 부족할 수 있다는 뜻이어서 원자재 가격이 추가 상승할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WSJ는 원자재 가격 상승세의 수혜 업종으로 에너지와 광업을 지목했다. 올해 들어 미국 석유채굴 기업 할리버튼의 주가는 57.8% 급등했다. 데번에너지와 마라톤오일 주가도 각각 29.7%, 48.8% 치솟았다. 미 광산업체 프리포트맥모란 주가는 구리 가격 상승세에 힘입어 19.9% 올랐다. 반면 미국 뉴욕증시의 대표 지수인 S&P500지수는 같은 기간 5.5% 하락했다. 다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정전협정을 맺거나 이란 제재 해제로 더 많은 원유가 시장에 유입되면 원자재 가격 상승세가 갑작스레 막을 내릴 수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물가 부담에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아 수요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중국에서는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수요 전망이 하향 조정되고 있다.
아울러 미국 중앙은행(Fed)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너무 빠른 속도로 인상하면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함께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